"레디(ready)~ 고(go)!" 진행자의 구호가 떨어지자 요란한 음악소리가 교정을 가득 채웠다. 머리칼이 희끗거리는 외국인 남성 옆에 꼭 붙은 아이가 "원(one) 투(two)"를 힘차게 외쳤다. 무릎이 아프다고 너스레를 떨던 노인도 꼬마의 구호에 맞춰 발을 내디뎠다. 오전부터 모여 삼삼오오 담소를 나누던 무리는 이인삼각 경주로 흥겨운 놀이를 시작했다.
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이화동의 서울사대부속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추억의 가을 운동회'가 열렸다. 추억이란 머리글을 달았으니 철부지 아이보다는 연배 지긋한 성인들에게 초점을 맞춘 운동회라는 걸 추측할 수 있을 터. 게다가 동심으로 돌아간 60~70대 노(老) 신사숙녀는 벽안(碧眼)이었다.
이들은 1960~70년대 한국을 찾아 봉사를 했던 54명의 미국평화봉사단원이다. 각자 고국에서 살다 이제서야 다시 한국을 방문했다. 가족과 친구를 포함, 총 88명의 이방인들은 줄다리기, 박 터뜨리기 등을 통해 수십 년 전 한국을 다시금 만끽했다.
행사를 주최한 한국국제교류재단 관계자는 "과거 자신이 일했던 학교나 병원 등을 찾아 한국의 발전상을 확인하고 과거의 인연을 다시 만나는 시간을 마련했다"고 소개했다. 2008년 시작해 올해로 네 번째인데 재단은 2013년까지 매년 행사를 열 예정이다.
흥겨운 잔치마당 한 구석에 매리 매코믹(63ㆍ뉴멕시코주)씨가 슬픔과 기쁨이 섞인 야릇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4월에 한국 방문이 결정됐을 때 이상하게 눈물이 납디다. 기분은 좋은데 왜 그런지." 그는 오전 일정을 마치자마자 운동회장으로 달려왔다.
매코믹씨는 78년부터 80년까지 전남 무주군의 무주중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겨울이면 난방이 안돼 오들오들 떨었던 기억, "몸을 덥히려면 김치를 많이 먹어야 한다"는 얘기에 입에 맞지 않던 매운 김치를 무턱대고 먹었던 추억이 살아 있는 곳이란다. 그는 12일 자신이 묵었던 하숙집을 찾아 펑펑 눈물을 흘렸다. "하숙집 아줌마와 아저씨가 그대로 살고 있었어요. 인사를 하고 몇 십분 꼭 안고 눈물만 흘렸죠."
눈물은 한국에 대한 사랑이라고 했다. 고작 2년의 시간이었지만 한국문화에 푹 빠져 정작 미국에 돌아갔을 때 적응에 애를 먹었다고도 했다. "무주 다음으로 부산에 살았는데 부산과 분위기가 엇비슷한 곳이란 생각이 들어 한때 뉴욕에 터를 잡고 살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보스턴에 사는 비키 쉐(56)씨도 75년 자신이 100여명의 한센병 환자를 돌봤던 전남 장성군을 찾았다. "한센병 환자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비밀스러운 일이었다. 주위에 알려지면 나는 물론 환자도 마을에서 쫓겨나야 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런 그가 35년 만에 반가운 이들과 해후했다. 10여명의 환자를 만난 것이다. "그새 손가락이 하나도 남지 않은 환자랑 악수를 하는데…"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한국에서의 자원봉사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 정신과의사의 길을 걷는 쉐씨는 "늘 한국이 그리웠다"고 덧붙였다.
10일 방한한 미국평화봉사단원은 16일 떠난다. 61년 창설한 미국평화봉사단은 66년부터 81년까지 2,000여명의 단원을 한국에 파견했다.
남상욱기자 thot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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