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의 수사선상에 올라 있거나 국정감사 증인으로 채택된 유력 인사들이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을 모면하고자 급하게 출국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외면하는 부적절한 처신이라는 비판과 함께, 당국이 '도피성 출국'을 사실상 묵인 또는 방조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일고 있다.
현재 미국 하와이에 체류 중인 천신일(67) 세중나모 회장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대우조선해양의 협력업체인 임천공업 이모 대표의 비자금 조성 의혹과 관련해 검찰 수사선상에 오른 천 회장이 출국한 시점은 지난달 중순. 그 즈음 검찰은 이 대표를 기소하면서 "천 회장과 이 대표의 관계는 좀더 살펴봐야 한다"고 여운을 남겼다. 검찰이 천 회장을 직접 언급한 것은 이게 처음이었고, 사실상 수사가 진행되고 있음을 밝힌 셈이었다. 허리디스크 재수술, 회사사업 등이 해외 체류의 이유라는 게 천 회장 측 설명이지만, 일단 검찰 수사를 피하려는 의도 아니냐는 게 검찰 주변의 일반적 해석이다. 지난해 '박연차 게이트' 사건 수사로 기소돼 항소심에서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은 천 회장은 이번 사건으로 유죄가 확정되면 실형을 면하기 어렵다.
특히, 12일 일부 언론에서 '천 회장이 귀국하지 않으려 한다'고 보도하자, 검찰도 당혹스러운 표정이다. 만약 천 회장이 해외에 장기 체류해 수사가 공전(空轉)할 경우 검찰이 진작 출국금지 조치를 취하지 않은 데 대한 비판이 일 것이기 때문이다. 검찰은 "의혹만 있는 상태에서 출국금지를 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지만, 범죄수사에 필요한 경우 내사단계에서뿐 아니라 참고인에 대해서도 출국금지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약하다. 더구나 천 회장 측이 임천공업과 계열사 2곳의 주식을 다량으로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검찰도 내사단계에서 파악한 상태였다.
한상률 전 국세청장 사건도 마찬가지다. 한 전 청장은 지난해 1월 인사청탁 목적으로 현 정권실세 인사들과 골프회동을 가졌다는 의혹과, 차장 시절 전군표 전 국세청장에게 그림로비를 했다는 의혹이 불거지자 사임했다. 야당과 시민사회에선 수사를 촉구했지만, 검찰은 나서지 않았다. 그러다 3월 중순 참여연대의 수사의뢰 이후 검찰은 뒤늦게 수사에 착수했지만, 이미 한 전 청장이 미국 유학길에 오른 뒤였다. 한 전 청장은 지금도 귀국 의사가 없다며 버티고 있고, 검찰도 "강제 귀국시킬 방안이 없다"며 팔짱만 끼고 있다.
국감 증인들의 해외출국에 따른 불출석도 도마에 오르고 있다. 딸 특채 파동으로 옷을 벗은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은 지난달 10일 국감 증인으로 채택되자, 같은 달 22일 일본으로 떠나 불출석 사유서를 제출한 뒤 지난 4일 국정감사장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차명계좌 비자금 의혹'을 받고 있는 라응찬 신한금융지주 회장 역시 이달 22일 예정돼 있는 금융감독원 국정감사 증인으로 채택됐지만, 11일 저녁 "투자자들에게 이번 의혹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며 미국으로 출국한 뒤 27일쯤에나 귀국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국감을 피하려는 노골적인 의도가 보인다는 지적이다.
사회지도층의 '도피성 출국' 관행을 근절하기 위해선, 국감 증인들에 대해서도 출석회피 목적의 출국을 금지시키는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박근용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팀장은 "출국금지가 남용돼서는 안 되지만, 강제수사 등 필요한 경우 당국이 신속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며 "하지만 근본적으로 지도층 인사들이 국가기관의 조사에 성실히 응하는 책임 있는 자세가 아쉽다"고 말했다.
김정우기자 woo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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