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2가 탑골공원(사적 제354호)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높은 탑이 유리 보호각 속에 홀로 갇혀 있다. 이 탑이 원각사10층석탑이다. 비록 탑의 상륜부가 없어지긴 했지만 높이가 자그마치 12m에 이르고, 국보 제2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원각사는 이미 법등이 끊어졌지만 이 탑과 대원각사비(보물 제3호)가 있어 원각사의 존재를 알려주고 있다. 원각사에는 원래 고려 때 흥복사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조선이 건국되었어도 법등은 이어왔으나 억불숭유 정책에 따라 사찰 기능 대신 약학도감으로 전용되다 조선 전기 세조 때인 1464년 다시 사찰로 환원하고 이름을 원각사로 하게했는데 주변 민가 200여 호를 철거하여 사역을 크게 확장했다.
이 때 건립된 여러 사찰 건물과 함께 이 원각사10층석탑도 세웠다. 조선의 건국이념이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소위 억불숭유정책인데 세조가 원각사를 건립한 것은 아이러니다.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 단종은 물론 많은 신하들을 제거한 데 대한 참회의 뜻으로 세웠다고 알려져 있으나 아무튼 국가적인 사찰이었음은 분명하다.
그 뒤 원각사는 연산군 때 사찰의 기능을 없애 악사들을 관장하는 장악원(掌樂院))으로 바뀌었다가 이어 중종 때인 1512년에는 건물을 헐어 사찰의 건물들이 없어져 폐사의 길로 들어섰다고 알려져 있고. 그 후 결국 원각사 터에는 이 10층 대리석탑과 1471년(성종 2)에 세운 대원각사비(大圓覺寺碑)만 자리를 지키고 남아있게 되었다.
폐허가 된 원각사 터는 공원으로 바뀌는데,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 소위 아관파천(莪館播遷) 후 민의의 수렴을 위해 사람이 모이는 공원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이 때 대한제국의 고문으로 와 있던 영국인 브라운이 건의하여 1897년(고종 34년, 대한제국 광무원년)에 이곳을 서양식 공원으로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이 곳은 1919년 3ㆍ1독립선언문 낭독과 독립만세를 외친 곳이 되었다. 원각사 터에 10층 대리석탑이 있어 조선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들은 탑을 파고다라 불렀기 때문에 탑이 있는 공원이란 뜻에서 파고다공원으로 이름 했던 것이다.
이 탑의 표면에 새겨진 조각은 조선불교 신앙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그러나 이 비가 자연에 그대로 노출되어 비둘기 배설물, 산성비 등의 원인으로 마멸이 급속하게 진행되자 보호를 위해 1999년 지금처럼 서울시에서 유리 보호각을 씌웠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식민통치하다 2차 대전에서 패망하기 직전 이 탑을 일본으로 옮겨가기 위 해 위의 3층까지 해체했으나 결국 옮겨가지 못하고 그대로 방치된 채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미군정청의 문교부 교화국 담당으로 있던 크네츠비치가 미군의 공병부대를 동원해 원상으로 복구 해놓았다. 이 크네츠비치는 6ㆍ25전쟁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 2만여 점을 부산으로 옮기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이기도 했다.
크네츠비치는 원각사탑을 아무런 전문가의 조언도 없이 복원했다. 복원 후 당시 이 사람을 '파고다 맨'이란 애칭으로 부르기도 했고, 1995년 12월 7일 문화체육부(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은관문화훈장을 수여했다.
경기문화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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