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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열규의 휴먼드라마] <6> 나의 광복 ; 귀환동포 마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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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열규의 휴먼드라마] <6> 나의 광복 ; 귀환동포 마중

입력
2010.10.12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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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우리들이 '해방 만세' '조선 독립 만세'라고 소리 지른, 그 광복!

그 당시 한국인, 아니 '조선 사람'이었으면 누구나 벅찬 감동으로 조국 해방을 겪었을 것이다. 감동의 크기, 환호의 크기야 누구에게나 비슷했을 테지만, 그 속내는 사람마다 조금씩 달랐을 법도 하다.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겪었는가에 따라서 차이가 날 법도 하기 때문이다.

내게는 그 기쁨, 그 보람을 특별난 것으로 기념하게 해준 엄청난 일이 주어졌다. 그것은 어쩌면, 뼈저린 아픔과 가슴 미어지는 고통을 안겨준 일이기도 했지만, 바로 그 때문에 더 한층 가슴 벅찬 일로서 경험되었다. 고통스러운 만큼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그 당시 겨우, 중학교 2학년이던 우리에게 막중한 임무가 주어졌다. 그것은 해외에서, 주로 일본에서 귀국해 오는, 소위 '귀환동포'를 마중하는 일이었다.

마중한다지만 귀환을 반기면서 태극기나 흔들어 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일본 제국주의자며 군국주의자들의 악랄한, 흉악한 횡포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그들이었다. 그 분들은 젊었든 나이 들었든간에, 일본 각지의 탄광을 비롯한 각종 광산에 강제 징용을 당해서는 중노동을 강요당했던 것이다. 강제 수용에 죄수들처럼 구속당해서는 막노동을 해야 했다.

돌아오는 그들의 모습은 말이 아니었다. 처참했다. 걸인(乞人)과도 같은 행색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초라한 몰골에는 지침과 굶주림의 빛이 역력했다. 제대로 발을 옮겨 놓지 못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병에 찌들 대로 찌든, 중환자도 껴 있었다. 세기말의 참상을, 인류의 마지막 날을 보고 겪는 것 같았다.

우리들은 그들 중에서도 간신히 걸을만한 사람은 부축해서 도와주었다. 환자는 아예 들것에 눕혀서 옮겨주기도 했다. 그것은 어린 우리들로서는 무척 힘겨운 중노동이나 다를 것 없었다. 병이 짙어서 금방이라도 변을 당할 것 같은 사람을 들것에 뉘면서 우리는 울기도 했다. 그의 참상이 너무나 마음 아팠던 것이다. 서러움에 북받치기도 했다.

거기다 우리들이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그 현장이 만만치 않았다. 부산의 제 1 부두가 우리의 작업장이었다. 그 당시 경부선 철도의 종착지는 부산의 제 1 부두였다. 네다섯 곳에 흩어져 있던 부두 중에서는 시설이 가장 잘 되어 있었다. 일제시대에 소위 '관부 연락선'이 일본의 시모노세키((下關ㆍ하관)와 부산항 사이를 오고 간, 부산의 대표적인 부두다. 그 점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여서 이 부두에서는 일본의 후쿠오카와 부산 사이를 페리가 정기적으로 내왕하고 있다.

광복한 며칠 뒤부터 관부연락선 중의 한 척이 전문적으로 귀환 동포를 실어 와서는 이 부두에 하선시켰다. 한데 귀환동포들은 그 큰 배의 갑판에서 배를 내리되, 부두의 2층을 이용하게 되어 있었다. 그들은 긴 2층 복도를 지나서는 높다란 계단을 타고는 아래로 내려와야 했다. 그리고는 기다리고 있던 트럭이며 버스를 또는 기차를 타고는 각자 고향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여기 문제가 있었다. 지칠 대로 지쳐 있던 귀환동포들로서는 바로 하선한 뒤를 이어서 평탄한 복도도 걷기 힘든 판에 가파른 층계를 내려온다는 것은 대단히 버거운 일, 힘겨운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들 학생들의 소임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절룩대는 어른들을 우리가 어깨받침 해서는 계단을 하나 하나 비틀면서 내려서야 했다. 운신을 제대로 못하는 환자의 경우는 우리들이 들것에 옮겨서 실어 날라야 했다.

우리들의 임무는 벅찼다. 가지 수도 많았다. 우선 부두에서 별로 가깝지도 않는 어느 초등학교에서 미리 마련해 둔 주먹밥을 트럭으로 날라 와야 했다. 그것을 배에서 내리는 귀환동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고루 나누어 주었다. 물론 큰 물동이에 수돗물을 받아 놓고는 그들의 마른 목을 축여 주기도 해야 했다.

우리가 내미는 주먹밥을 받아서 입에 넣기도 전에 눈물부터 먼저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고맙소! 고맙소! 학생들"

울먹이면서 주먹밥을 베어 무는 그들의 손이 떨리고 입이 떨렸다. 그들은 그들 눈물을 고명삼고는 굶주린 배를 간신히 채워나가는 것이었다. 우리 눈에도 눈물이 괴였다.

그들이 먹다 남긴 것으로 점심 끼니를 때우던 우리들은 8월 무더위로 해서 줄줄 이마에서 흐르는 땀으로 주먹밥을 적시곤 했다. 조금 전까지 귀환동포 업어 내리랴, 부축해 내리랴 해서 온 몸이 땀에 절어 있는 탓이기도 했다.

그런 중에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되었다.

잘 걷지도 못하는 동포 한 사람을 부축해서는 그의 겨드랑이 아래로 내 어깨를 들이밀었다. 한데 바로 그 순간, 나의 어깨 살에 질끈 하고는 무엇인가가 엉겨 붙는 게 아닌가! 한여름이라 러닝 셔츠만 입은 나의 어깨와 역시 어깨 벗어 젖힌 귀환 동포의 맨 살이 맞닿은 것이다. 그 무엇인가가 엉겨 붙는 게 언짢았다. 와락 어깨를 문질렀다. 피고름이었다. 내 손이 이내 누르스름하고도 불그陸輪構?물들었다. 그의 가슴팍의 종기가 내 어깨 살에 밀려서 터진 모양이었다.

순간 나는 움찔했다. 하지만 어쩌랴. 이를 악물고 코를 감싸고는 그를 부축하는 내 어깨에 더한층 힘을 들여야 했다. 하필이면 그 피고름으로 해서 그와 나 사이에서 조국 광복은 엄청 절실해진 것이다. 그의 종기가 내 맨살을 누르고 드는 것이 그의 몸과 내 몸이 한 덩치가 되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 묘한 일체감에 젖어서는 그를 부축해서 계단 밑까지 내려오고도 나는 한 동안 그의 겨드랑이에서 손을 뺄 수가 없었다.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물론 그가 어느 고장의 누구인지는 알 턱이 없다. 그 첫 만남이 곧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게 우리들 인연의 전부였다. 하지만 그날 그 순간의 그의 피고름의 촉감은 지금도 내 어깨 살갗에는 스며있다.

그 광부들을 일본 정부는 지금도 학대하고 있다. 아직도 우리 광부들에게 지불하지 않고 있는 밀린 노임이 태산 같을 것이다. 지난 날의 이른바, 한일협정을 핑계 대고는 시치미 떼고 있다. 그것을 생각하면 그날의 피고름의 아픔이 새삼 더 한층 저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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