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황장엽 전 조선노동당 비서만큼이나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을 찾긴 힘들다.
황 전 비서는 북한 최고 권력층 일원에서 한순간에 탈북자의 신분으로 바뀐 뒤 북한 반체제 운동가로 명성을 날렸다.
1923년 평안남도 태어난 황 전 비서는 김일성대와 모스크바대학 철학부에서 수학한 뒤 1952년 29세의 나이로 김일성종합대 철학과 교수가 됐다. 1959년 노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을 역임한 뒤 39세 때인 1962년 김일성종합대 총장이 됐다. 그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거쳐 북한 권력 서열 13위까지 오르는 등 출세 가도를 달렸다.
그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도 인연이 깊다. 망명 전 그는 당시 후계자 신분이던 김 위원장의 백두산 출생설을 퍼뜨리는 등 후계구도 구축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김 위원장이 김일성대학에 다닐 때 주체사상을 가르쳤던 황 전 비서는 ‘선군 사상’과 함께 북한의 2대 통치 이데올로기 중 하나인 ‘주체사상’의 최고 이론가로도 활동했다.
그는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로 있던 1997년 2월12일 베이징 주재 한국총영사관에 전격 망명해 북한을 큰 충격에 빠뜨렸다. 당시 북한은 망명 다음날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며 적에 의해 납치됐음이 명백하다"고 억지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같은 해 4월20일 황 전 비서가 국내에 들어와 북한을 비판하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했을 때는 이를 ‘선전포고’라고 규정하고 “민족 파멸의 전쟁 불씨를 퍼뜨리는 노망한 자의 망발이며, 황 역적을 반드시 황천객으로 만들 것”이라고 격한 반응을 보였다.
망명 후 황 전 비서는 정부 연구기관의 책임자로서 남북관계와 통일 문제를 연구하기도 했다.
이후 황 전 비서는 탈북자동지회, 북한민주화위원회 등의 탈북자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강연과 방송을 통해 북한 실상을 알리는 데 힘써 왔다.
그는 최근에는 대학생들에게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안보 강연을 부정기적으로 하고 대북 단파 라디오 자유북한방송에서 ‘황장엽 민주주의 강좌’란 프로그램에 출연해왔다.
지난 3월 말에는 미국과 일본을 잇달아 방문해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공개 강연을 하고 정부와 민간 인사들을 두루 만나 북한 권력층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그를 북한 당국이 계속 주시하며 협박과 암살을 시도하자 우리 정부는 공안 기관을 통해 24시간 근접 경호하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왔다. 특별한 선발 절차를 거쳐 뽑은 20여 명으로 구성된 경호팀은 24시간 3교대로 근무하면서 황 전 비서를 밀착 경호해왔다.
황 전 비서는 남한의 대북정책과 관련 ‘경이원지’(敬而遠之) 라는 원칙을 제시하기도 했다. 경이원지란 겉으로는 공경하는 체하면서 가까이 하지는 아니한다는 뜻이다. 황 전 비서는 그간 정부와 민간 기관 등을 대상으로 강연하면서 “북한이 완전히 개혁개방으로 나아갈 때까지는 외적으로 존중하는 것처럼 하면서 외교적으로 대해야 한다”면서 “다만 (북한을) 기대하지 말고 믿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해왔다.
유인호기자 yi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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