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지의 대기업 일광그룹 남 회장은 비자금 수천억원을 조성한 혐의로 실형을 받자 심복인 회사 임원 윤성훈에게 특명을 내린다. 권력기관을 상대로 해오던 로비의 범위를 검찰까지 확대하라는 것. 경쟁자인 태봉그룹 회장이 일찍부터 법조계를 잘 관리해온 덕에 구속 한 번 안 당하고 기업 비리 수사를 무마하는 것을 보고 자극 받은 것이다. 나아가 세금 납부를 최소화하면서 아들에게 편법으로 경영권을 물려주려는 그에겐 신변과 재산을 지킬 확실한 방패막이가 절실한 터였다.
윤성훈은 계열 건설사에서 불법 조성한 비자금 1조원을 받아 작업에 착수한다. 가장 먼저 한 일은 태봉그룹에서 권력기관 관리 업무를 맡았던 박재우를 스카우트한 것. 여기에 미국 유학파 경제학박사인 강기준이 가세, 세 사람은 '문화개척센터'라는 괴상한 이름의 조직을 신설하고 법조계, 국세청, 언론계 등을 상대로 한 전방위 매수 작업에 나선다.
소설가 조정래(67)씨는 장편소설로는 (2007) 이후 3년 만에 낸 이 책에서 돈을 앞세워 권력기관을 장악해가는 재벌의 행태를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소설에서 윤성훈 등이 경제 부처, 국정원, 검찰의 핵심 요인을 그룹으로 스카우트해서 관리 가능한 인맥을 넓히는 동시에 여느 정부 기관 못지않은 고급 정보를 축적해가는 과정은 최근 한 검사 출신 변호사의 폭로로 실상이 드러난 대기업의 비리를 떠올리게 한다. 작업이 너무나 순조롭게 이뤄지는 데 스스로 놀란 윤성훈이 "돈 힘이 참으로 무섭고 위대하군"이라고 읊조리는 장면은 오늘날 한국 사회의 상황에 대한 작가 조씨의 절망감을 반영한다.
이 소설에서 조씨의 인물 묘사는 독특하다. 그는 윤성훈 등에게 복잡한 내면을 전혀 부여하지 않는다. 물욕과 성욕에 단단히 사로잡힌 이들에겐 성찰이나 회의를 기대할 수 없다. 성과급 액수에 불만을 품은 강기준이 또다른 경쟁사로 이직하는 결말부는 이들의 비윤리성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어찌 보면 지나치게 전형적이고 밋밋한 인물 묘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무릅쓴 작가의 과감한 시도 덕분에 소설의 긴장감과 비판 효과는 극대화된다. 덕분에 이 소설은 장편 분량임에도 단숨에 읽히고 단편소설에 버금가는 강한 인상을 남긴다. 대하소설 으로 단련된, 유장하면서도 한시도 긴장을 놓지 않는 조씨의 필력이 그 바탕이다.
일광그룹의 거침없는 불법 행위는 세금 겨우 20억원 내고 매출 200조원 규모의 회사를 통째로 대물림하는 데 이른다. 일광그룹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주장한 검사 전인욱, 이 회사의 불법 경영권 승계를 낱낱이 밝힌 신문 칼럼을 쓴 교수 허민은 각자 자리에서 쫓겨나 시민단체에서 의기투합한다. 이들의 투쟁이 일광그룹의 거대하고 구조화된 불법행위를 단죄할 수 있으리라는 호들갑스러운 전망은 소설에 없다. 다만 일반 국민과 대중을 '자발적 복종자' '욕심의 노예'라고 조롱하며,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하는 일광그룹 삼인방의 오만을 보여주면서, 작가는 독자에게 어느 편에 서야 할 것인지를 넌지시 묻는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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