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직업으로 약사, 빠지지 않는다. 전문직이면서 의사 변호사보다 업무량이나 스트레스가 덜 하고 직장에 다니다 상황에 따라 약국을 개업할 수도 있으니 참 장점 많은 직업이다. 그 좋다는 약사를 때려치우고, 그 험하다는 사업가의 길로 들어선 이가 있다. 식품기업 해누리의 정정례(57) 대표다. “왜 사서 고생을 하나”라고 묻는 기자에게 “그래도 좋은 걸 어떡하나”라며 되묻는다.
빵에 발라 먹는 청국장
“약사요? 대접받죠. 사업 시작한 뒤론 입장이 바뀌었어요. 오는 손님을 내가 설득하고 대접해야 하니까요. 어떤 땐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싶기도 하지만 약보다 좋은 식품을 만들어 팔아야겠단 생각을 하면 힘이 납니다.”
약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약은 병이 들어서 먹지만 좋은 식품으로는 병을 예방까지 한다는 게 약사 출신 정 대표의 철학이다. 건강엔 약보다 음식이 먼저라는 것. 정 대표에게 사업가의 길을 열어준 ‘좋은 식품’은 청국장이다.
“대학 때 기숙사에서 친구들과 고추장 된장을 빵에 발라먹곤 했어요. 청국장이 좋다는데 남편과 아이들이 잘 안 먹길래 옛날 생각이 나서 빵에 발라줬어요. 그건 먹더군요. 내친 김에 집에 있던 양파랑 들깨, 올리브기름, 농축시킨 사과를 청국장에 섞어 발라봤죠. 식구들이 맛있다 하던데요.”
해누리의 대표제품 청국장잼은 그렇게 처음 만들어졌다. 있는 거 이것저것 넣던 재료를 우리 농산물 13가지로 표준화하고 청국장 특유의 냄새를 없애기 위해 고춧가루도 약간 첨가했다. 여기저기 봉사활동을 다니며 청국장잼을 알려보니 다른 사람들 입맛에도 잘 맞는다는 걸 알게 됐다. 2005년 특허를, 2007년 첫 제품을 냈다. 회사는 그 해 10월 설립했다.
“돈 물론 부족했죠. 2007년 정부가 신기술을 발굴해 지원하는 사업에 청국장잼 아이디어를 냈는데 운 좋게도 선정이 됐어요. 그런데 법인을 내야 지원비를 받을 수 있더군요. 법인이 뭔지도 몰랐는데, 정말 맨땅에 헤딩한다 결심하고 사업을 시작했어요.”
다행히 청국장잼 반응이 좋았다. 요즘에는 유치원이나 요양병원으로 들어가는 물량도 늘고 있다. 청국장잼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개발한 청국장버터도 곧 출시할 계획이다. 지난해 해누리 매출은 약 2억5,000만원을 기록했다.
남은 인생 활기차고 도전적으로
두 아이를 키우며 약국을 운영한 세월이 20년이다. 사업하다 힘들면 아무래도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까.
“글쎄요. 약국 할 땐 솔직히 문만 열어놓으면 됐어요. 지금보다야 삶이 훨씬 편했죠. 하지만 의사 처방대로 약을 팔기만 하는 일이 사실 따분하고 단조로웠어요. 여든 넘어서까지도 거뜬히 사는 세상인데 남은 인생을 할머니처럼 가만히만 지내려니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이 다 무슨 소용이냐 싶었죠.”
사업하면서 정 대표는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비즈니스맨들을 만나고, 마케팅 강의도 듣고, 눈도 침침한데 컴퓨터까지 다시 배웠다. 온라인쇼핑몰이나 홈쇼핑에도 진출했다. 지금까지 약사로 살았다면 경험해보지 못했을 일들이다.
“이젠 약국 하는 친구들이 오히려 나를 부러워해요. 식품사업은 특히 여성들이 도전하기에 좋은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정 대표는 수출에까지 손을 뻗었다. 잘 되면 올해 매출은 5억원 이상 바라볼 수 있을 거란 예상이다. 수출 물꼬를 튼 제품은 감염색약. 올 3월 일본 도쿄시내 매장에 첫 선을 보였다. 해누리 생산공장이 있는 경북 청도군은 감이 유명하다. 감염색약은 덜 익거나 버려지는 감을 골라 타닌을 추출해 만든다. 타닌은 떫은 맛을 내는 성분. 단백질과 만나면 색깔이 변하는 특징이 있다.
“타닌 성분이 머리카락 단백질을 만나면 갈색이 돼요. 바로 이 원리를 이용한 염색약이죠. 기존 염색약에는 대부분 옻 성분이 들어 있어요. 그래서 피부가 약한 사람들은 머리를 염색한 뒤 염증이 생기기도 해요. 미용실에서 쓰는 산화제는 냄새가 심하죠. 암모니아성분이 들어 있어서 그래요. 우리 산화제는 암모니아가 없어 냄새가 안 납니다. 또 예부터 감 풀어낸 물에 부드러운 천을 담가두면 뻣뻣해졌어요. 감염색약을 쓰면 머리카락에 힘이 생기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발효식품 세계화 목표
한식 세계화에 요즘 참 관심들이 많다. 정 대표는 특히 우리 발효식품이 경쟁력 있다고 본다. 청국장잼과 감염색약에 이어 해누리의 대표제품이 된 세라믹볼간장에 일본 기업이 관심을 갖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는 설명이다. 세라믹볼간장은 구슬 모양으로 구운 세라믹(광물질)을 간장과 함께 용기에 담은 제품이다. 흔들면 세라믹볼이 용기에 부딪히며 딸랑딸랑 소리를 낸다.
“간장을 항아리에 담아두면 숙성뿐 아니라 살균효과도 있어요. 요즘 아파트에선 항아리 쓰기가 쉽지 않죠. 대신 세라믹볼을 간장에 넣어두면 살균작용도 일어나고 잡냄새도 없어집니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 “사업가로 새 인생 꿈꾸는 여성, 지원하세요”
정정례 해누리 대표는 지난해 한국여성발명협회에서 세라믹볼간장의 시제품 제작비용으로 약 350만원을 지원받았다. 아이디어를 실제 제품으로 판매하기 전 시장성이 있는지 판단하기 위해 보통 시제품을 제작한다. 신생기업이나 중소기업에선 그 비용도 적잖은 부담일 수 있다.
한국여성발명협회는 2007년부터 매년 여성발명자를 대상으로 시제품제작지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해마다 2월쯤 공모해 30∼40건을 선정하고 건당 최대 400만원을 지원한다. 선정 조건은 특허가 실용신안, 디자인 등의 산업재산권으로 등록되지 않은 순수한 발명 아이디어. 시제품 제작을 통해 발명자는 특허출원을 해도 좋은지, 사업화에 부족한 부분은 없는지 등을 사전에 확인할 수 있다. 아이디어를 사업으로 발전시켜 새로운 제2의 인생을 설계하려는 여성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셈이다.
협회 관계자는 “아이디어 단계 발명의 특허출원 비율을 높이고 사업화로 연결시키는 직접적인 동기를 부여한다”며 “이 사업의 지원을 받은 제품이 각종 발명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고 말했다. 협회 조사결과 지금까지 시제품제작지원사업의 혜택을 받은 총 92개 제품 가운데 22개가 실제 제품화했거나 판매 중이며, 16개가 제품화를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임소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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