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은 전통과 첨단이 공존하는 도시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버킹엄 궁, 세인트폴 성당 등 수백년의 역사를 간직한 명소와 테이트모던 미술관, 런던시청, 런던아이 등 최신 건축물들이 어우러지며 조화로운 도시 경관을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런던을 상징하는 이런 건축물들의 분포에는 묘한 특징이 있다. 전통적 랜드마크들은 하나같이 템스강 북쪽에, 최근 10년 새 새로 생긴 곳들은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런던의 정치, 경제, 문화는 모두 템스강 북서쪽을 중심으로 발달해왔고 이로 인한 강북과 강남 간의 격차는 오랫동안 런던 통합의 걸림돌로 지적됐다. 하지만 최근 낙후된 지역에 새로운 랜드마크를 세움으로써 주변 지역의 개발을 유도하고 사회적 불균형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공존과 화합이라는 화두에 따라 도시 재생의 방향이 강북에서 강남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뻗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도시 자체를 바꾼 ‘테이트 효과’
지난 5월 출범 10주년을 맞은 테이트모던 미술관은 템스강변에 20년간 폐쇄된 채 방치돼 있던 거대한 화력발전소를 미술관으로 리모델링해 성공을 거둔 것으로 너무나 유명한 사례다. 템스강의 보행자 전용 다리인 밀레니엄 브리지를 사이에 두고 세인트폴 성당과 마주하고 있는 이 미술관을 찾는 사람은 한 해 500만명. 테이트모던은 런던에서 가장 가난한 자치구 중 하나였던 서더크 지구를 런던의 문화 중심으로 끌어올리며 ‘테이트 효과’라는 말까지 낳았다.
런던에서 이는 비단 테이트모던에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동부 지역의 명소로 떠오른 와핑프로젝트는 1890년 지어진 수력발전소를 레스토랑 겸 전시장으로 바꾼 곳이다. 붉은 벽돌 건물 내부로 들어가보니 높은 유리 천장에서 자연광이 내리치는 가운데 칠이 벗겨진 기계와 녹슨 철제 구조물들이 군데군데 놓여있고, 발전소에서 수압을 재던 측정계까지 눈에 띄었다. 기계 사이사이에 놓인 테이블에서는 젊은이들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전시장으로 쓰이는 지하 보일러실 공간에는 조명과 사운드로 구성된 현대미술작품이 설치돼 있었다.
이곳의 단골 손님이라는 레슬리 쿠퍼(29ㆍ건축가)씨는 “과거에 대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독특한 분위기 때문에 예술가나 트렌드세터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패션모델 케이트 모스가 이곳에서 결혼을 하고 싶다고 했는데, 나 역시 같은 생각”이라며 웃었다. 지역 주민 데클란 팔론(40)씨는 “와핑 프로젝트는 규모 면에서 테이트모던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침체된 동네에 새로운 활기를 몰고 왔다는 점에서 지역의 자랑거리”라고 말했다.
런던 남동부 루이샴 지구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자리잡은 라반센터는 댄스뮤지컬 ‘백조의 호수’의 안무가 매튜 본을 배출한 세계적 무용학교다. 2003년 확장 이전하며 새로운 건물을 지었는데, 테이트모던 리모델링과 베이징올림픽 주경기장 설계를 맡은 스위스 건축가 헤르초크&드 뫼롱, 그리고 영국의 유명 화가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이 함께 디자인해 세계적 관심을 모았다. 반투명 재질의 폴리카보네이트로 덮인 외관, 곡선으로 부드럽게 휘어진 독특한 형상이 주변 환경에 자연스레 녹아든다.
하지만 라반센터의 진정한 미덕은 건물의 외형이 아니라 지역 커뮤니티와의 연계성에 있다. 라반센터는 전문적인 무용 교육을 받는 학생 450명 외에 매주 1,000여명의 사람들에게 춤을 가르친다. 지자체와의 협력을 통해 장애인, 어린이, 교사 등 다양한 계층을 대상으로 한 맞춤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무용교사들이 병원, 학교 등 지역의 공공시설들을 직접 찾아가서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한다. 건물 1층에 일반인을 위한 대규모 스튜디오를 마련하는 등 건축 초기부터 커뮤니티 재생을 염두에 뒀다.
라반센터의 베로니카 조빈스 커뮤니티개발국장은 “원래 이곳은 쓰레기장이 있던 자리였고, 주위도 대부분 버려진 땅이었다. 하지만 라반센터가 생긴 이후 지역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바뀌면서 빌딩과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했고,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고 말했다.
건축과 사람의 소통, 일상으로
“공공 디자인에 대한 대중의 참여를 유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좋은 디자인을 직접 보여주는 것이다.”
런던의 건축교육단체인 오픈시티를 이끄는 디렉터 빅토리아 손튼의 말이다. 오픈시티는 1992년부터 매년 9월에 오픈하우스라는 이름의 건축 축제를 개최, 런던 시민들을 건축물 속으로 끌어들인다. 전문가들이 선정한 750여개의 건축물이 문을 활짝 열고 속살을 내보인 올해 행사에는 무려 25만명의 시민들이 참가했다. 길쭉한 생김새 때문에 거킨(gherkinㆍ오이지)이라 불리는 스위스재보험사 빌딩, 친환경 시스템으로 유명한 런던시청 등 대규모 건축물뿐 아니라, 작은 학교나 주택 등도 대상이 됐다.
특히 올해 인기를 모은 곳은 2012년 런던올림픽을 위해 동부 뉴햄 지구의 스트래트포드 지역에 지어지고 있는 올림픽파크 건축 현장. 스트래트포드 지역은 런던의 대표적인 빈민 지역이자 인도, 파키스탄 등 이민자들의 거주율이 높은 곳이다. 올림픽 주경기장을 비롯해 공원, 주택 등 각종 시설들을 이곳에 집중 건설함으로써 소외된 동부 지역을 살리겠다는 런던시의 뚜렷한 의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손튼 디렉터는 “대규모 개발을 할 때 정작 대중이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되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이 좋은 건축물이나 개발이 진행되는 현장을 방문해 느끼고 평가함으로써 주위의 환경을 새롭게 인식하는 것이 살기 좋은 도시를 향한 출발점이 되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최근 런던의 건축 역시 지역 커뮤니티의 참여 비중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추는 추세다. 공공건물 전문 건축가로 영국 왕립건축가협회 회원이기도 한 성주은씨는 “런던에서는 교육시설 등 지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는 공공건물을 지을 때 구상과 설계는 물론 완성 후 사용하기까지 전 단계에 걸쳐 실제 그 시설을 이용하는 지역 주민의 목소리를 듣고 반영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라고 소개했다.
2002년 만들어진 이후 영국 건축물의 품질을 평가하는 자료로 널리 활용되고 있는 DQI(Design Quality Indicatorㆍ디자인 품질 지표) 역시 건축주와 건축가, 사용자 간의 단계별 워크숍 개최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고 있다. 성씨는 “사람들의 주인의식과 관심이 없다면 건축물을 통한 지역의 재생은 불가능하다”며 “지속가능한 건물, 나아가 지속가능한 도시를 만드는 것은 결국 커뮤니티의 참여”라고 말했다.
런던= 김지원기자 eddie@hk.co.kr
■ 국내사례,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서울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기대를 모으고 있는 곳은 단연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한 자리에 들어서는 (DDP)다. 서울시가 세계 디자인의 메카를 만들겠다는 목표 아래 3,755억원을 투입해 지난해 4월부터 짓고 있다. 지하 3층, 지상 4층에 총면적 8만5,320㎡ 규모로, 2012년 7월 완공될 예정이다.
DDP는 영국의 스타 건축가 자하 하디드(60)가 설계했다. 하디드가 디자인한 DDP는 알루미늄 패널 4만6,000개로 덮인 비정형 구조물로, 액체의 흐름 같기도 하고 우주선 같기도 한 파격적인 모습이다. 최근 유선형 디자인의 3차원 곡선을 만들기 위한 529톤 무게의 초대형 지붕을 설치하는 작업이 마무리됐다. 내부에는 각종 전시시설과 컨벤션홀, 체험관 등이 들어선다.
서울시는 이곳에서 세계적인 디자인 전시를 열고 디자인 관련 콘텐츠를 모아 파리 퐁피두센터나 뉴욕현대미술관(MoMA)처럼 디자인 트렌드를 선도하겠다는 계획이다. DDP가 완공되면 한국의 디자인 경쟁력이 세계 5위가 되고, 동대문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이 현재 320만명에서 400만명으로 증가해 동대문이 서울 경제의 중심으로 재등장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도 내놓았다.
그러나 DDP가 정작 패션산업을 기반으로 한 동대문의 지역적 특성과 별 연관성이 없다는 비판도 나온다. 지역이 가진 자산과 콘텐츠를 보존, 활용하지 않고 막대한 비용을 투입해 새로운 것을 이식하는 것은 지역 재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건축가는 "패션산업 진흥이라는 요구에서 비롯된 DDP가 서울시 디자인 정책을 선도하는 공간으로 변질된 측면이 있다. 향후 공간 운영에 있어 디자인 산업뿐 아니라 지역 발전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지원기자
■ 히슬롭 테이트모던 지역재생·협력 국장
테이트모던은 세계 최고 수준의 컬렉션과 혁신적 큐레이팅으로 유명한 현대미술관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테이트모던의 백미로 터빈홀을 꼽는다. 말 그대로 화력발전소 시절 터빈이 있던 공간이다. 미술관 서쪽 출입구 역할을 하고 있는 터빈홀은 5층 건물 건체를 관통하는 높이에 바닥 면적 3,400㎡의 어마어마한 규모다. 매년 한 명의 작가를 선정해 6개월간 각종 초대형 설치 프로젝트를 마련하는데, 전시가 없을 때라고 해서 역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방석을 깔고 앉아 책을 읽거나 쉬기도 하고, 이곳에서 상영되는 영화를 보거나 강연을 듣기도 한다.
테이트모던의 도널드 히슬롭 지역재생ㆍ협력 담당 국장은 "터빈홀은 도시와 미술관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는 동시에 관람객과의 소통을 통해 완성되는 열린 공간이라는 점에서 테이트모던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곳"이라고 말했다.
테이트모던은 건립 준비 단계부터 지역재생 담당 부서를 만들었다. 히슬롭 국장은 "미술관을 건립함으로써 얻어지는 모든 이익들을 최대한 지역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가게 하는 것이 핵심 이슈였다"고 설명했다. 저소득층이 많이 사는 지역이라 문화 시설이나 녹지가 부족하다는 점에 착안해 지역 주민을 위한 미팅룸과 영화 감상 클럽을 만들었고, 입구에 정원을 만들어 접근성을 높였다. 10주년 기념 전시 때는 세계적 작가들이 주민들과 텃밭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그는 "지역의 22개 문화단체들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늘 정보를 교환하고 있으며, 현재 건립 중인 분관을 이용해 교육 프로그램을 더욱 강화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한국에서도 과거의 산업 시설을 예술공간으로 바꾸는 프로젝트가 늘어나고 있다는 말에 "그 공간이 도시와 문화의 맥락에서 어떤 자리에 놓일 것인지, 지역 사람들이나 주위의 다른 시설과 어떻게 관계할 것인지, 친환경이나 지속가능성 등 동시대 이슈들을 어떻게 담아낼지 등을 다각도로 고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히슬롭 국장은 "테이트모던이 좋은 미술관인 것은 예술에 대해 모르는 초보자들도 부담없이 찾아올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과거의 미술관은 침묵 속에 위대한 예술품을 바라보는 장소였지만, 이제는 웃고 대화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공간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이성과 감성에 동시에 어필할 수 있는 곳이 이 시대에 진정으로 필요한 미술관입니다."
런던=김지원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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