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중후반 박찬호가 선발 등판하는 날이면 한국은 새벽부터 들썩거렸다. 한마디로 5일마다 한 번씩 ‘임시 공휴일’이었다. 야구팬들은 재방송을 하는 저녁까지도 인천방송(iTV)을 틀어 놓고 환호성을 질렀다. 학생들은 수업시간에 몰래 이어폰을 꽂고 라디오 중계에 집중했다. 박찬호 경기가 있는 날은 ‘박찬호 어떻게 됐어’가 그날의 인사였다.
컴퓨터 게임에서나 만날 수 있었던 메이저리그 빅스타들이 박찬호와 함께 그라운드에서 호흡했다. 투수들은 140㎞를 넘는 변화구를 아무렇지도 않게 뿌려댔고, 야수들은 그림 같은 호수비를 밥 먹듯이 해냈다. 한국 야구와는 너무 다른 이들의 실력은 충격 그 자체였다. 실력뿐 아니라 구단마다 특색 있는 메이저리그 구장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감독이 불펜에 전화를 걸어 투수를 바꾸는 모습은 부럽기까지 했다.
박찬호는 야구의 ‘ABC’도 우리에게 일깨워줬다. 5이닝을 던져야, 게다가 이기고 있는 순간에 마운드를 내려와야 승리투수가 된다는 사실, 투구수 100개가 선발 투수의 한계인 것도 그때 알게 됐다. ‘박찬호 도우미’ 마이크 피아자와 게리 셰필드, 션 그린도 덩달아 국민적인 스타로 떠올랐다.
박찬호가 타석에 들어서는 것도 놓칠 수 없는 재미였다. 그가 성공시키는 희생번트나, 이따금 터트리는 안타는 우리의 마음을 시원하게 했다. 99년 애너하임전에서 희생번트를 댄 후 상대 투수 팀 벨처에게 날린 ‘태권도 이단옆차기’는 아직도 뇌리에 깊이 남아 있다. 한마디로 LA 다저스는 단순한 메이저리그 팀이 아닌 5,000만명의 팬을 보유한 한국 팀이었다.
야구 중계방송이 다양해지고 수많은 한국 선수들이 바다 건너 미국으로 진출하고 있지만 박찬호의 다저스 시절 메이저리그 인기를 따라갈 수는 없다. 아니 절대로 불가능하다. 우리 같은 ‘박찬호 키드’에게 그는 야구 선수 이상이었다. 외환위기로 깊은 시름에 빠진 국민들에게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줬고, 청소년들에게는 꿈과 희망을 전파했다. 그로부터 10년 후 나는 야구를 담당하는 스포츠 기자의 길로 들어섰다.
박찬호가 드디어 아시아 최다승 투수가 됐다. 지난 17년간 숱한 시련을 겪었지만 그 때마다 오뚝이처럼 일어나 이뤄낸 피땀 어린 결실이다. 이제 국내무대로 복귀하든, 빅리그에서 은퇴를 하든 나는 그의 모든 선택을 존중한다. 그는 여전히 나에게는 ‘우상’이자 ‘전설’이기 때문이다.
김종석기자 left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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