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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소수서원과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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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소수서원과 인문학

입력
2010.10.01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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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경북 영주에 있는 소수서원을 다녀왔다. 고려 말의 유학자 안향을 제향하고 그의 유학 정신을 잇기 위해 1543년 주세붕이 세운 서원이다. 그 후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명종 임금에게 사액을 요청해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임금이 직접 서원 이름을 짓고 현판에 글을 적어 내린 것은 지금으로 말하면 국가 공인 사립대학에 해당한다.

소수서원은 주세붕 이황을 추가로 제향하고 353년 동안 4,00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특히 퇴계 이황의 많은 제자들이 소수서원을 거쳐 조선 유학의 전통을 이끌어가는 선비사회의 기틀을 세웠다. 소수서원 이후로 많은 사액서원이 나와 650 여 곳이나 된다. 조선 후기로 접어들어 서원은 당쟁과 당파의 온상으로 변질되어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소수서원을 포함한 47 곳만이 남았다. 지금의 서원은 대개 인적이 드문 유적지나 관광지가 되어 지역의 세금으로 보존되고 있다.

학생과 선생이 사라지고 관광안내문이 세워진 옛 사당과 강의실 연구실 기숙사 등을 돌아보며 옛 학교의 모습을 그려 본다. 소수서원에서 가르친 첫 번째 규율은 제사를 지낼 때는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승과 선배에 대한 존경과 그 뜻을 이어가는 기상을 닦는 일을 으뜸 덕목으로 삼았다. 율곡 이이는 나이 스물에 스스로 성인이 되고자 하는 큰 뜻을 세우고 끝없이 정진하겠다는 다짐을 한다. 사람을 배우는 인문학에서 훌륭한 스승과 선배에 대한 존경과 자부심은 가장 중요한 자산이다.

오래 전 친구가 교수로 있는 영국 케임브릿지 대학을 찾은 기억이 난다. 캠퍼스 안에 있는 기념관을 둘러 보면서 그 곳에서 학문을 닦아 역사에 이름을 올린 위대한 학자들의 흉상들을 보며 부러워한 적이 있다. 한국의 명문 사립대학 캠퍼스에 19세기 말 외국인 선교사들의 동상이 개교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서있는 우리 대학의 역사는 그에 비해 짧고 초라하다. 수백 년 역사를 이끈 철학자나 경제학자들의 흉상을 줄줄이 세워 놓은 그들의 자부심과, 19세기말 서세동점의 역사적 상황에서 기독교나 민족주의를 개교 이념으로 삼은 우리 대학을 비교할 때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소수서원의 역사가 말해주듯 우리에게도 자랑할만한 학문과 교육의 역사가 있다. 어느 나라의 역사에도 뒤지지 않는 활발한 학문과 교육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 스스로 역사의 중심에 서지 못했기 때문에 학문의 역사를 학교의 역사로 이어가지 못했을 뿐이다. 근대식 교육이란 이름으로 전통적 학문의 뿌리를 단절하는 방식으로 근대식 학교들이 세워지면서 우리 학교의 역사는 새롭게 시작하였다.

인문학을 하는 가장 중요한 자세는 인격을 이루겠다는 다짐과 기상을 닦는 일이다. 율곡 이이가 스스로 세운 격률처럼 인문학적 전통에 대한 자부심은 뜻을 가까이 품고 기상을 닦는 첩경이다. 조선 인문학의 전통과 정신을 학문과 교육의 뿌리로 삼아 그 역사의 연장선에서 서양의 학문을 수용하며 학교의 역사를 진화, 발전시키지 못한 상황은 안타까운 일이다. 문 닫은 서원과 항교들을 관광지나 유적지로 남겨 둘게 아니라 다시 교육 기능을 회복하고 학생들을 받는 일은 시대착오적일 것이다. 그러나 폐교된 건물에 서려있는 우리 조상의 기상과 뜻만큼은 늘 되새길 가치가 있다. 오늘날의 인문학이 제 구실을 못하는 까닭의 하나는 우리나라 대학의 역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조성우 영화음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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