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신(功臣)은 왕조시대에 국가나 왕실을 위해 큰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주던 칭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초부터 시작됐다. 조선시대에는 개국공신을 비롯하여 28종류의 공신이 있었다. 이 가운데 충무(忠武)는 국가에 공이 큰 무신들에게 내려준 시호(諡號)이다. 대표적인 장수가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이다. 다시 말해 충무공은 이순신 장군 한 사람만이 아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순신 장군의 유적을 성역화하는 사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하면서 본명보다도 충무공 시호를 내세웠다. 이 때문에 충무공하면 곧장 이순신 장군을 떠올린다. 역사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은 탓도 있다. 역사학자나 교사들이 '충무'란 공신 시호를 받은 사람이 이순신 장군뿐만 아니라 여러 명이란 사실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충무란 공신의 호를 받은 사람은 아홉 명이나 된다. 시대 순으로 볼 때 가장 먼저 충무공 시호를 받은 사람은 조영무(趙英茂)이다. 그는 태종 이방원(李芳遠)의 심복 부하였다. 고려 말 개성 선죽교에서 충신 정몽주(鄭夢周)를 암살한 인물로서 조선이 건국되자 개국공신에 봉해졌다.
두 번째 충무공 호를 받은 사람은 이준(李浚)이다. 세종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臨瀛大君)의 둘째 아들로서, 세조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고 예종 초에는 남이(南怡)의 옥사를 다스리는데 공을 세웠다고 하여 공신의 반열에 올랐다. 세 번째 충무공은 '소년 장수'로 유명한 바로 그 남이이다. 남이는 세조 때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이준과 함께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여 적개공신 1등에 올랐다. 여진 정벌에도 큰 공을 세웠으며, 불과 27세에 병조판서가 되었다가 간신 유자광의 참소로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 남이와 그의 옥사를 다스린 이준의 시호가 같은 충무였으니 공교롭다.
시대적으로 네 번째 충무공이 이순신 장군이다. 다섯 번째 충무공은 이순신과 같이 임진왜란 때 순국한 김시민(金時敏)이다. 그는 진주목사로서 임진년(1592년) 10월 5일 겨우 3,800명의 민군을 거느리고 7일간의 격전 끝에 2만여 왜군을 물리쳤다. 이것이 한산대첩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이다.
여섯 번째 충무공 이수일(李守一)은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웠고, 1602년 병마사로 여진족을 소탕했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부원수로 출정하여 반군을 대파했다. 뒷날 형조판서를 지냈다.
일곱 번째 충무공 정충신(鄭忠信)도 임진왜란 때 어린 나이로 공을 세웠고,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 공을 세웠다. 그는 무술에 뛰어났으며 천문 지리의학 복서에도 밝았다. 여덟 번째 충무공 구인후(具仁垕)는 인조의 외사촌 형이다. 인조 반정에 참여했고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냈으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공을 세웠다. 아홉 번째 충무공 김응하(金應河)는 광해군 때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후금(後金) 정벌에 나섰다가 아깝게 전사한 장군이다.
이처럼 충무공은 이순신 외에 여덟 명이나 더 있기 때문에 충무공을 이순신 장군을 일컫는 대명사처럼 써서는 안 된다. 충무공이란 공신의 호를 사용할 때에는 '충무공 이순신'과 같이 반드시 그 뒤에 본명을 붙여야 옳다. 참고로 중국인들이 존경하는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승상 제갈량(諸葛亮)과 송(宋)나라의 명장 악비(岳飛)의 시호도 충무공이다.
황원갑 소설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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