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정상의 셰프들이 선택한 한국의 식재료는 한우, 김치, 깻잎, 고추장이었다. 28일 그랜드 하얏트 서울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서울 고메 2010’ 그랜드 갈라 디너에서 셰프들은 명성에 걸맞은 기량을 뽐냈다. 50만원이나 하는 고가의 식사였는데도 행사 당일까지 남은 좌석이 없느냐는 문의가 이어졌다. 주최측이 협찬사에 할애한 좌석 중 몇 개 비기는 했지만 요리에 일가견 있는 미식가들은 요리 하나하나를 맛보고 카메라에 담느라 바빴다.
초청된 7명의 셰프 중 6명이 하나씩 선보인 이날의 메뉴는 대체로 그들이 평소 만들던 대표 요리였다. 아름다운 프리젠테이션은 눈길을 끌었다. 일부는 과감한 실험정신을 과시, 명성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한식의 세계화라는 행사 본연의 목적에 방점을 둔 메뉴는 찾기 힘들었다. 그나마 상훈 드장브르 셰프가 김치를 이용한 정도였다.
실험적인 요리
창의적인 실험정신은 첫 코스와 마지막 코스에서 한껏 드러났다. 꿀에 절인 배와 얼린 푸아그라로 식욕을 돋군 웰컴 디시에 이어 서빙된 첫 코스는 이탈리아 칼로 크라코의 ‘계란 스파게티’. 밀가루를 전혀 넣지 않고 계란으로만 만든 스파게티면은 투명한 주황색에 쫀득한 질감으로 색다른 맛을 선사했다. 면을 씹으면 계란맛이 퍼져 나온다. 계란 스파게티는 이탈리아 밀라노 번화가에 위치한 그의 레스토랑 리스토란테 크라코의 독특한 메뉴다.
신기하기는 했지만 맛이 썩 즐겁지는 않았던 크라코의 요리와는 달리, 스페인의 디저트 셰프 조르디 로카는 창의적인 디저트로 오감을 자극했다. 향수 디저트로 유명한 그는 땅을 뜻하는 ‘테르 드 에르메스’ 향수 종이를 먼저 테이블에 서빙했다. 이 향수에서 영감을 받은 그의 디저트는 자스민 거품이 안에 들어있는 초콜릿 볼, 그 위에 패츌리 뿌리 아이스크림, 초콜릿 쿠키 가루, 깨의 어린 싹 등을 얹은 것이다. 모양부터 지구와 흙과 물과 식물이다. 놀라운 것은 달콤쌉싸름한 초콜릿과 어린 싹의 맛 사이를 채운 흙 냄새와 질감. 흙의 질감은 분명 초콜릿 쿠키 가루 덕분이다. 그런데 은은한 흙 냄새는 어디서 온 것일까? 로카 셰프는 “고향땅 카탈루니아 지방의 흙을 넣고 낮은 온도에서 끓여 증류한 물로 소스를 만들었다”고 비결을 설명한다. 두 형과 함께 운영하는 그의 레스토랑 엘 셀레르 데 칸 로카는 2010년 미슐랭 가이드 별 3개를 얻고 전세계 톱 50 레스토랑 중 4번째로 꼽혔다.
아름다운 요리
갈라 디너는 아름다워서 즐거운 식사였다. 검은 오징어 먹물과 우윳빛 잣 크림으로 접시를 장식하고 고소한 오징어의 향과 알싸한 카레향을 조화시킨 스페인 페르난도 델 세로의 오징어 구이는 눈과 입, 코가 모두 즐거운 요리였다. 메인 요리인 안심 스테이크를 내놓은 미셸 투아그로도 가지 피클과 당근 퓨레 등을 써서 그림처럼 아름다운 가니시장식을 곁들였다. 상훈 드장브르는 노랑, 빨강 피망종이(피망 간 즙을 종이처럼 얇게 펴 말려 살짝 튀긴 것)와 초록 깻잎을 도미 위에 얹어 컬러풀한 요리를 만들어냈다. 정상급 셰프들의 마무리 솜씨는 한 수 배울 만한 가치가 있었다.
한식의 세계화 가능성
세계적 셰프들의 명성을 이용해 한식과 한국 식자재의 세계화 통로를 만들겠다는 ‘서울 고메 2010’ 행사의 목적을 염두에 둔다면 이에 걸맞은 요리는 한국계 벨기에인 상훈 드장르브의 도미뿐이었다. 그는 도미 구이에 김치를 얹고 고추장으로 접시를 장식해 살짝 신 맛과 매운 맛을 가미했다. 또 노랑, 빨강 피망종이(피망 간 즙을 종이처럼 얇게 펴 말려 살짝 튀긴 것)와 초록 깻잎을 도미 위에 얹어 다채로운 색·맛·향을 조화시켰다. 매칭시킨 술도 포도주가 아닌 막걸리였다.
그는 “지난해 처음 한국을 방문한 이후 맛보았던 김치 갈비 된장찌개 등을 내 요리에 접목시키는 방법을 연구해왔다”며 “외국인의 입맛에 맞게 덜 매운 맛을 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프랑스에서는 한식을 맛볼 수 있는 식당도 거의 없고 한식에 대해 잘 모른다”고 말했던 미셸 투아그로 셰프와는 대조적으로 행사 참가 전 한식에 대한 관심과 준비가 있었고 결과적으로 메뉴의 차이를 낳았다. 다른 셰프는 안동 한우(미셸 투아그로), 애호박과 잣(페르난도 델 세로) 등 한국 식자재를 쓰기는 했지만 한식과 연관 짓기는 힘들었다. 이탈리아의 파티셰 루이지 비아제토는 더 거리가 먼 베네수엘라식 초콜리 소르베 ‘몽 아모르’를 내놓았다.
해외 진출하는 한식이 꼭 정통 재료와 조리법을 고수할 수는 없다. 다만 한식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하고, 한식이라는 이미지로 포장하는데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본질적 요소는 필요하다. 일식의 세계화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해온 무라타 요시히로 일본요리아카데미 이사장은 “변형된 한식도 한식이며, 세계인의 입맛에 맞으면서 한국적인 맛을 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런 점에서 해외 정상급 셰프들로부터 조리법이나 프리㉴戮抉?같은 기법을 배우는 것은 유용하지만, 시장 한 번 둘러보게 한 후 곧바로 한식을 만들게 하는 접근은 무리다. 현지에 맞는 한식을 한식으로 포장하는 데에 성공한다면 한국 식재료는 더불어 세계에 알려질 만하다.
김희원기자 h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