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줄기가 굵어지자 강부남(68)씨의 얼굴이 하얘진다. 추석 연휴를 맞아 조금은 들떠 있던 9월 21일. 오전부터 쏟아진 폭우 때문에 강씨의 논도 어느새 물바다로 변해있었다. 이미 농로까지 물에 잠겨 논으로는 들어갈 수조차 없는 상황. 발을 동동 구르며 비가 멎기를 기다리던 그가 조용히 내뱉는다. "하늘이 어찌 이리 무심할까."
서울 강서구 개화동에서 35년 동안 농사를 지은 서울 농부 강씨. 여느 농부가 그렇듯 그는 벼를 거둘 때마다 하늘에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하지만 올해는 추수를 코 앞에 두고도 굵은 비를 뿌린 하늘의 심술에, 그가 어찌할 바 모른 채 당황하고 있다.
6,000평 가운데 1,000평만 멀쩡
"벼가 몽땅 젖었으니 이를 어찌할꼬."
강부남씨가 자신의 논을 둘러보고 한숨을 내쉰다. 빗줄기가 멈추자마자 논으로 달려가 서두른 덕에 그의 논은 이제 물이 다 빠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면 바닥은 여전히 질퍽질퍽해 발이 푹푹 빠질 정도다. 9월초 태풍 곤파스가 쓸고 간 들판에 다시 추석 폭우가 이어지면서, 노랗게 익어가던 벼가 바닥으로 힘없이 쓰러져 하얗게 썩어가고 있다. 급한 마음에 낫을 들었지만, 물기 머금고 넘어진 벼를 베기가 쉽지 않다.
그런 벼는 힘들어 베어내도 사실 별 쓸모가 없으니 강씨의 속이 온전할 리 없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임대한 논을 포함해 그가 농사를 짓는 논 6,000평 가운데 고작 1,000평 정도만 태풍과 비의 피해를 모면했다. 강부남씨는 "이 지역에 9월 들어 이처럼 많은 비가 내린 것은 농사를 지은 뒤 처음"이라며 " 올해는 날씨가 나빴어도 작황이 예년 정도는 될 것으로 예상했는데 그런 기대가 다 무너졌다"고 아쉬워했다. 강씨뿐 아니라 이곳 개화동과 인근 과해동, 오곡동 등에서 농사를 짓는 서울 농부들은 다 같은 피해를 보았다.
강씨는 정성 들여 가꾼 벼일수록 피해가 더 큰 게 특히 안타깝다고 했다. 그는 "벼가 실해 무게가 더 나가고 키가 클수록 피해가 많았다"며 "대충대충 농사지은 사람은 피해가 적었다"고 말했다.
서울 산이기는 하나 이 곳 쌀에 대한 소비자의 반응은 매우 좋은 편이었다. 특히 경복궁쌀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되는 추청벼 품종은 단연 인기가 높다. 경복궁의 임금님이 먹던 쌀처럼 밥 맛이 좋다는 뜻에서 이런 상표를 붙였는데 서울의 유일한 브랜드 쌀로 재고가 남지 않을 정도다. 강씨도 "차지고 촉감이 좋아 한번 먹어본 사람은 반드시 다시 찾는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올해는 태풍과 비 때문에 미질이 예년처럼 좋을지 장담할 수 없다.
할 일 많고 분주한 서울 농부의 삶
개화들녘은 행정구역상 서울에 속하지만 서정적인 농촌 풍경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 비행기가 김포공항을 쉼 없이 뜨고 내려도, 지하철 9호선 열차가 들판을 가로지르며 달려도, 지평선 너머 키 높은 아파트가 경쟁하듯 올라가도 개화들녘의 풍경은 아직 넉넉하다. 농로에 핀 코스모스도, 가을의 전령 잠자리도, 논 가운데 있는 2층 원두막도 들판의 서정을 더해준다.
강부남씨는 개화동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다. 할아버지 때 충남 부여에서 개화동으로 옮겨왔는데 아버지가 한국전쟁 당시 공항 부근 미군부대에 취직, 돈을 벌어 논을 산 것이 이곳에서 농사를 짓게 된 계기다. 4남매의 맏이인 강부남씨는 아버지의 농사일을 돕다가 35년 전 아버지가 작고한 뒤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이 지역이 절대농지로 묶이는 등 규제가 심해 농사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데다, 농사 짓는 아버지를 돕다 보니 자연스럽게 농민이 됐다.
개화동은 경기평야의 일부로 경기 김포군 양서면에 속했다가 1968년 서울에 편입됐다. 서울 땅이 된 지 40년이 넘었지만 강씨는 "논에 있다 보면 아직도 서울인지 시골인지 나도 구별이 안된다"며 "서울이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떤가"라고 말한다.
서울 농부라고는 하나 그의 삶 역시 여느 시골 농부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농번기에는 새벽 다섯 시든, 여섯 시든 눈만 뜨면 논으로 나간다. 자전거로 15분 정도 달려 논에 도착한 뒤 아침 일을 얼마간 해놓고 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는다. 아침밥 먹고 논으로 다시 나가 일하다 보면 어느덧 점심 시간이다. 새참은 없다. 농사 규모가 크지 않은데다, 사람보다 기계의 힘에 많이 의존하기 때문에 굳이 새참을 챙길 이유가 없다. 대신 가끔 원두막에서 다른 농민들과 전화로 자장면을 시켜 먹는다. 잠시 쉬다 오후 노동을 시작한다. 일 좀 하다 보면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다. 그렇게 하루 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늘 뿌듯하다.
추수 끝나고 겨울이 되면 들판에 스케이트장이 들어선다. 벼 벤 논에 물을 받아 얼린 것이다. 강씨는 이곳에서 아이들 스케이트 끈 매는 것을 돕고 안전을 살피는 일을 하며 겨울을 보낸다.
농업인구의 고령화로 농사 명맥 걱정
서울 농촌 개화동도 여느 농촌처럼 몇 가지 문제를 안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농업인구의 고령화다. 농민 대부분이 60대 이상이어서 얼마 가지 않아 농사의 명맥이 끊어질지 모른다. 강부남씨도 직장 생활을 하는 아들과, 시집간 두 딸이 있지만 누구도 농사를 짓지 않으며 그렇게 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논 한쪽에 자리한 주말농장에 젊은 사람들이 오가지만 그들에게 농사는 주업이 아니라 주말의 소일거리다. 가끔 농사 짓겠다고 들어오는 젊은이들이 있는데 그들 대부분은 논을 매립, 밭으로 바꾸거나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상추 쑥갓 고추 토마토 등을 재배한다. 밭에서 채소를 기르는 것이 논농사보다 돈벌이가 낫다고 보기 때문이다. 농업인구의 고령화로 전반적인 마을의 활력도 떨어졌다. 농악놀이도 사라지고 잔칫날 온 주민이 술 한잔 하며 떠들썩하게 놀던 일도 볼 수 없다.
또 한가지 두드러진 것은 생태계의 변화다. 강씨와 이웃들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비가 내리면 미꾸라지가 지천으로 나뒹굴었다고 기억한다. 메기 쏘가리 뱀장어 붕어 잉어도 많았다. 찬바람이 도는 9월의 저녁에는 농로로 뛰쳐나온 참게가 발에 채일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그런 것들을 그때만큼 볼 수가 없다.
옛 시절을 회상하면 좋은 것, 나쁜 것이 함께 떠오르는데 강씨는 이곳에서 보낸 농사 인생을 과장하지도 않고 그것에 큰 의미를 두지도 않는다. "배운 것이 농사이니 이것 말고 무엇을 또 할 수 있었겠느냐"는 반문에서 그가 좋든, 싫든 농사를 천직으로 여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농사가 잘 될 때도, 못될 때도 있는 법"이라며 "날씨 때문에 올해 농사를 망쳤지만 농부는 농사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는 만큼 힘이 남아있는 동안 이 일을 계속하겠다"는 강부남씨의 말이 더 자연스럽고 솔직하게 들린다.
■ 서울 농부 7000명, 여의도 1.6배 농경지서 구슬땀
초고층 빌딩 사이에서 바삐 움직이는 서울 사람들. 그들 가운데 다수가 서비스 산업, 현대식 산업 등에 종사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찾아보면 1차 산업에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도 생각보다 많다. 서울시 농업기술센터에 따르면 서울에서는 2,130가구 7,084명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서울의 농경지는 1,340㏊에 이르는데 이는 여의도 면적의 1.6배에 해당한다. 농경지 가운데 804㏊는 밭이고 536㏊는 논이다. 강동 송파 등 남동지역에서는 시설채소를, 강서 양천 구로 등 남서지역에서는 벼를, 강남 관악 등 남부지역에서는 시설화훼를, 중랑 노원 강북 등 북동지역에서는 배를 주로 재배한다.
농경지가 적은 만큼 농산물 생산량도 다른 지역과 비교할 때 매우 적은 편이다. 2008년 기준 쌀 생산량은 1,371톤으로 전국 생산량의 0.03%에 불과하다. 채소도 0.3%, 배도 0.23%에 그친다. 반면 서울에서 생산하는 철쭉은 전국 생산량의 55.7%에 이른다. 서울시 농업기술센터는 서울의 농산물 생산량이 매우 적지만 그래도 서울에 농부가 있고 이들이 농산물을 재배한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강조한다.
박광희 편집위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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