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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앗! 옥집을 집으로… 프로대회서 승부 뒤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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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앗! 옥집을 집으로… 프로대회서 승부 뒤집혔다

입력
2010.09.30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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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에서 옥집이 완전한 집이 아니라는 건 바둑을 조금이라도 둘 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기본 상식이다. 당장은 집처럼 보이지만 바깥 공배가 다 채워지면 결국 그곳을 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데 프로기사의 공식 대국에서 옥집을 정상적인 집으로 생각하고 계가를 해서 반집 차이로 승부가 뒤바뀌는 어이 없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추석 연휴 다음날인 지난달 24일 바둑TV스튜디오에서 제4기 지지옥션배 여류 대 시니어연승대항전 제17국 안관욱과 김윤영의 대국이 벌어졌다. 바둑 내용은 매우 치열했다. 중반까지 김윤영이 상당히 우세했으나 종반에 들어서면서 안관욱이 맹추격을 해서 마지막까지 과연 누가 이길 지 알 수 없는 아슬아슬한 형세가 계속됐다.

마침내 두 시간에 걸친 열전이 끝나고 두 대국자가 차례로 공배를 메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안관욱(백)이 단수에 몰린 상태인 옥집(기보 A의 곳)을 잇지 않고 그냥 계가를 시작한 것. 이 경우 김윤영이 이를 발견하고 상대에게 이으라고 하거나 아니면 자기 차례에 냉큼 상대방 돌을 따 내면 그만이다. 실제로 공배를 메우는 과정에서 자기 돌이 단수가 된 줄 모르고 있다가 상대에게 따 먹혀서 역전패를 당한 해프닝은 그동안 프로들의 실전에서 심심치 않게 있었다.

한데 공교롭게도 두 대국자가 초읽기에 쫓기며 아슬아슬한 승부에 몰두하느라 정신이 없었는지 안관욱 뿐 아니라 김윤영도 백돌의 바깥 공배가 모두 메워져 단수 상태가 됐다는 걸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김윤영이 기보의 A를 정상적인 집으로 생각하고 그곳에 백의 사석을 메우고 계가를 진행했다. 그랬더니 백 반집승이 됐다. 정상적으로 계가를 했다면 흑 반집승이었을 텐데 옥집을 집으로 계산하는 바람에 승부가 뒤집힌 것이다. 축구로 치면 스스로 자살골을 넣은 셈이다.

이럴 경우 김윤영이 계가가 잘못된 것을 깨닫고 곧바로 이의를 제기하면 승부를 바로잡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시 김윤영은 자신의 실수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고 상대인 안관욱도 마찬가지였다. 프로의 대국에서 좀처럼 있을 수 없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래서 두 대국자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백 반집승이라는 승부 결과를 인정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사건은 여기까지다. 보통 때라면 김윤영이 매우 억울하겠지만 보기 드문 해프닝이 벌어진 것으로 치부하고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바둑이 당시 바둑TV에서 생중계되고 있었다는 것. 두 대국자가 옥집을 메우지 않고 그냥 계가하는 모습이 모니터에 비치자 우선 해설자 한철균(7단)과 김효정(2단)이 깜짝 놀랐다. 이미 흑 반집승이 확실하다고 방송에서 밝혔는데 계가 과정에서 엉뚱하게 승부가 뒤집히다니 이를 시청자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난감했다. 또 이런 경우 백승이 맞는 건 지, 흑승이 옳은 건 지도 확실치 않았다. 그래서 바둑TV에서는 일단 안관욱의 반집승이라고 대국 결과를 내 보낸 후 대국자들과 함께 녹화테이프를 다시 돌려보고 역시 계가 과정에 잘못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지만 이미 대국이 종료된 상황이어서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부랴부랴 한상렬 한국기원 사무총장과 상임이사들에게 연락을 취해 의논한 결과 “김윤영이 대국 종료시까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므로 백의 승리로 인정한다”는 유권해석을 받아냈다.

이렇게 해서 공식적으로는 ‘안관욱 승’으로 결론이 났지만 당시 바둑TV를 통해 계가 과정을 지켜본 전국의 바둑팬들 사이에서는 이번 사건의 처리를 둘러싸고 열띤 논란이 벌어졌다. 인터넷바둑사이트에서는 “프로기사로서 매우 망신스러운 일”이라는 원론적인 얘기에서부터 “김윤영의 승리로 바로잡아야 한다” “안관욱이 스스로 패배를 인정하는 게 옳다” “무승부로 처리해야 한다” “양자패가 옳다”는 등 각양각색의 의견이 쏟아졌다. 특히 최근 바둑이 정식 체육종목으로 자리매김 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식 대국에 심판이 없다는 게 큰 문제라는 지적이 많았다. 지금도 주요 대국에 입회인이 배석하긴 하지만 말 그대로 입회인일 뿐 바둑 내용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언행을 일체 할 수 없도록 돼 있어서 이번과 같은 돌발사태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없는 실정이다.

한편 안관욱은 행운의 승리 이후 이튿날 벌어진 김혜민과의 대국에서도 이겨 4연승을 거뒀는데 1주일 후인 10월1일 열릴 예정이던 루이나이웨이와의 제19국에는 기권했다. 안관욱은 “공식적으로는 내가 이긴 것으로 결정이 났지만 공배를 메우면서 단수가 된 것을 모르고 있었다니 프로기사로서 무척 부끄러운 일이다.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이런 상태에서 내가 계속 출전한다는 게 영 마음이 개운치 않다. 지지옥션배가 단셈活潔底?내 마음대로 기권하는 게 옳은 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4연승을 거둬 내 몫은 충분히 했으니 시니어팀 동료들도 이해해 주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한국기원 홈페이지에는 “잘한 일이다. 역시 대전신사(안관욱의 별명)답다”는 네티즌의 댓글이 쇄도했다.

박영철 객원기자 indr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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