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한 스릴러가 대세다. 스크린을 적시는 붉은 피에 관객들이 소스라쳐도 충무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지만 반전의 기미가 보이고 있다. 반란의 주역은 ‘시라노; 연애조작단’’. 추석시즌 치열한 흥행 대전을 거친 이 로맨틱 코미디 영화는 28일까지 142만 관객을 모으며 ‘추석영화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멜로나 로맨틱 코미디는 이젠 다 죽었다”는 충무로의 한탄을 무색하게 하며 ‘시라노; 연애조작단’은 핑크 빛 설렘으로 충무로를 조금씩 물들이고 있다.
로맨스 영화의 부활을 알린 김현석(39) 감독을 24일 오후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일본의 유명 스쿠터를 타고 나타났다. ‘시라노; 연애조작단’의 희중(이민정)과 상용(최다니엘)이 즐기는 스쿠터 데이트가 머릿속에서 나온 장면이 아닌 듯 했다.
연애 대행업소가 사랑에 서툰 사람들을 위해 돈을 받고 조언을 해주고 연애를 위해 여러 가지 상황까지 조성해준다는 기발한 착상은 1994년 김 감독이 군대에서 써놓은 시나리오 ‘대행업’에서 비롯됐다. ‘코르셋’과 함께 대종상영화제 시나리오 공모전에 당선됐지만 이어폰을 끼고 연애 지도를 받는다는 내용에 ‘시라노; 연애조작단’의 제작자인 심재명 명필름 대표마저 당시 뜨악하게 반응했던 시나리오였다.
세태가 바뀌면서 플로피디스크에 담겨 묻혔던 시나리오는 지난해 15년 만에 빛을 봤다. 김 감독은 “한 의뢰인이 연애대행업 대표의 옛 애인과의 연애를 시도한다는 얼개만 남고 다 바꾸었다”고 했다. 논문을 대필했다가 대학에서 쫓겨나면서 여자친구와 헤어진 연애대행업소 대표는 프랑스 유학파 연극 연출가로 탈바꿈했다. 프랑스의 고전 희극 ‘시라노 드벨주락’이 포개지면서 이야기가 한층 무르익었다. 무엇보다 “판타지로 가득했던 연애에 대한 시선이 좀 더 냉정해졌고, 어설픈 감정들을 다듬었다”고 김 감독은 말했다.
영화 속엔 김 감독의 체험과 사랑에 대한 생각이 스며있다. 희중이 연애 대행업소 대표 병훈(엄태웅)과 헤어지며 반지를 조개탕에 빠뜨리는 장면은 김 감독의 연애담과 겹친다. “상용이 목사의 설교가 너무 길다며 공개적으로 불만을 터트리는 장면은 제가 교회에서 늘 하는 상상입니다. 사랑에 대해 전 냉소적이에요. 연애대행 덕에 사랑을 이룬 현곤(송새벽)이 결국 바람 피는 설정을 넣은 이유죠.”
김 감독은 연세대 재학 중 시나리오 작가로 데뷔했다. “영화동아리 생활을 2년 동안 했는데 영화를 못 만든 게 억울”해서 군 입대 전 쓴 ‘사랑하기 좋은 날’ 시나리오가 덜컥 영화화되면서 충무로에 첫발을 디뎠다. 그에게 영화감독의 꿈을 심어준 영화는 고교시절 본 배창호 감독의 멜로영화 ‘기쁜 우리 젊은 날’. 그는 “말 못하고 표현하지 않는 사랑이 훨씬 멋있다는 착각을 만들어준 영화다. 아마 ‘비트’ 같은 영화를 봤으면 훨씬 멋있는 남자로 성장했을 것”이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야구를 소재로 한 ‘YMCA야구단’으로 감독 데뷔를 하고, 선동열이 등장하는 ‘스카우트’를 만든 그는 충무로의 소문난 야구광. 배우 박철민이 감독이고 엄지원이 구단주인 사회인 야구단 ‘비광’(‘스카우트’의 박철민 대사 ‘나는 비광’에서 유래)에서 중견수로 활약하고 있다. “김성한 감독을 닮았다”(그는 ‘슈퍼스타 감사용’에 김성한 역으로 출연했다)고 하자 “살 빠지면 이종범이다. 두 선수 닮았다면 영광”이라고 답했다.
야구와 사랑이라는 두 개의 키워드로 자신만의 영화세계를 구축해온 그는 “이제 야구 영화나 로맨틱 코미디 영화는 만들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다음 작품은 ‘경찰대 미술반’. 경찰대 미술동아리 출신 세 친구가 특정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그린다. “여대랑 조인트 MT 갔다가 여자 때문에 의절하는 세 남자가 등장하지만 멜로는 아니에요. 굳이 장르 규정을 하면 액션 스릴러입니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홍인기기자 hongi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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