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에 사는 남모(45)씨는 잦은 현기증으로 병원을 찾았다가 백혈병이 의심된다는 말을 듣고 서울성모병원 만성골수성백혈병클리닉 김동욱 교수를 찾았다. 검사 결과는 만성골수성백혈병이었다. 김 교수는 곧바로 남씨에게 글리벡(노바티스)을 처방했다. 그리고 이 약을 복용한 지 3개월이 지난 후 유전자 검사에서 글리벡 내성 반응이 나타나자, 김 교수는 임상 3상 시험 중인 타그시나(노바티스)로 바꿀 것을 권유했다. 남씨는 고심 끝에 약을 바꾸었고 이후 다행히 병세가 크게 호전됐다.
5년 생존율 89%로 껑충 뛰어
만성골수성백혈병은 혈액 줄기세포에 이상 염색체인 필라델피아 염색체가 생겨 갑자기 백혈구가 늘어나는 질환이다. 인구 10만명 당 1, 2명 발생하며 전체 백혈병 환자의 15% 정도를 차지한다.
백혈병의 치료 역사는 1998년을 기점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유도미사일처럼 암세포만 골라서 파괴하는 1세대 표적항암제인 글리벡이 나온 것이다. 전에는 불치병으로 여겨지던 만성골수성백혈병이 치료할 수 있는 질병으로 바뀌었다. 이 항암제는 이전의 어떤 치료법보다 안전하고 생존율이 높아, 환자에게 삶의 희망을 안겨 주었다. 그 후 새로운 치료제가 속속 개발돼 지금은 약물치료를 받는 환자의 5년 생존율이 89%에 이를 정도로 높아졌고, 기대 수명도 평균 25년이나 늘었다.
만성골수성백혈병의 1차 치료는 환자 나이와 관계없이 1세대 표적항암제 글리벡과 2세대 표적항암제인 타시그나, 스프라이셀(BMS) 등 같은 약물요법이다. 약값이 상대적으로 비싸다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효과와 안전성이 탁월해 널리 쓰이고 있다.
표적항암제 임상시험의 메카
백혈병 치료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김동욱 교수가 외래진료에 나서면 수많은 의료진이 그 뒤를 따라 나서 진료실이 꽉 찬다. 제약사에서 나온 임상시험 연구간호사 3, 4명과 김 교수가 소장을 맡고 있는 가톨릭대 의대 분자유전자연구소의 통계담당 연구원, 그리고 외래간호사까지 포함해 7, 8명이 진료실에서 바쁘게 움직인다.
김 교수는 만성골수성백혈병 표적항암제 임상시험을 주도하고 있다. 만성골수성백혈병 신약은 거의 대부분 김 교수를 통해 국내는 물론 아시아 전역에서 쓰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2001년 세계 최초의 만성골수성백혈병 치료제인 글리벡의 국내 임상시험을 담당했다. 또한, 수퍼글리벡으로 불리는 타시그나, 미국 BMS의 스프라이셀, 미국 와이어스의 보수티닙도 김 교수 주도 하에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임상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김 교수가 이끌고 있는 만성골수성백혈병클리닉은 국내 만성골수성백혈병 환자 2,200여명 가운데 절반이 넘는 60%를 진료하고 있는데, 이는 단일 의료기관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다. 다국적 제약사들이 김 교수에게 끊임없이 임상시험을 의뢰하는 것도 바로 그래서다. 희귀암인 만성골수성백혈병의 환자군을 폭 넓게 확보해 병의 진행상황에 따른 다양한 양상을 연구하는 데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김 교수가 주도하는 신약 임상시험으로 인해 국내 만성골수성백혈병 환자들은 폭넓은 치료 기회를 얻고 있다. 새로운 항암제가 일반 환자에게 쓰이려면 7, 8년이 걸리는데, 임상시험 대상자가 되면 곧바로 신약을 투여 받을 수 있다. 또한 임상시험에 참여하면 검사비와 치료비가 모두 무료여서 경제적 부담도 덜 수 있다.
연구ㆍ임상ㆍ치료 연계해 시너지 효과
김 교수가 소장을 맡고 있는 분자유전자연구소는 병을 연구하고 이를 곧바로 진단과 치료에 활용하는 ‘중계 연구(Translational Research)’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다른 대학병원 연구소들과 차별화된다.
이 연구소는 2005년부터 스위스제약사인 노바티스가 지정한 세계 5대 ‘국제 백혈병 유전자 분석 표준 연구소’에 위촉돼, 현재 25개 국내 병원을 포함한 아시아 전역에서 의뢰 받은 검체(검사가 필요한 인체 조직) 분석을 진행하고 있다.
김 교수는 이러한 검체 분석을 통해 고유의 진료 프로토콜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만성골수성백혈병 환자에게 3개월 간격으로 표준화된 유전자 검사를 실시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처방 약물의 반응을 예측하는 것이다.
김 교수는 “글리벡 출시 이후 만성골수성백혈병 생존율이 90% 가까이 높아졌지만, 글리벡 치료가 2년 내에 효과가 없으면 타시그나 등 2세대 표적항암제를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때문에 김 교수는 “글리벡의 반응 여부를 좀 더 빠르게 예측하기 위해 유전자 검사를 시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분자유전자연구소에서는 만성골수성백혈병 진단법을 표준화한 유전자 분석 키트를 아시아 전역에 보급하는 한편, 아시아 환자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있다. 현재 중국에 3개, 인도에 4개 병원을 포함해 아시아 16개국의 유수 병원에서 환자 데이터베이스를 수집해 2,700여 건의 환자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었다.
분자유전자연구소는 교육 분야에??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김 교수가 개발한 ‘아시아 백혈병 유전자 분석 표준화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아시아의 주요 대형병원 의사와 과학자 등에게 표준 진료지침을 교육시키고 있다. 김 교수는 “우리 연구소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의사와 과학자는 이미 미국과 유럽 선진국의 연구소나 병원에서 연수를 마친 전문가”라며 “우리 연구소에서 연수를 받은 숫자가 같은 프로그램을 운영 중인 영국 국제만성골수성백혈병재단에 연수를 받은 숫자보다 훨씬 많다”고 말했다.
김 교수가 이처럼 국내를 넘어 해외로 눈을 돌리는 이유는, ‘의학’이 ‘과학’을 기초로 발전한다는 원칙에 근거하고 있다. 그는 “의학은 과학의 일부로, 얼마나 많은 환자의 통계자료를 증거로 제시했는지에 따라 우위가 결정된다”며, “아시아 전역을 넘어 유럽환자의 통계까지 수집하려는 노력이 있어야만 한국이 세계 만성골수성백혈병 연구의 중심으로 거듭날 것”이라고 말했다.
권대익 의학전문기자. dk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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