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제위기 삭풍, 비정규직 여성에 더 혹독하게 몰아쳤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한 A(27ㆍ여)씨는 졸업 후 2년여동안 준비해 온 공무원시험을 포기한 뒤 일자리 찾기에 나섰다. 하지만 대부분의 회사는 여성을 원하지 않았고 여성을 찾는 경우엔 경력직을 선호했다. 결국 월 80만원 남짓한 최저임금을 받는 콜센터에 비정규직으로 입사할 수밖에 없었다. A씨는 "여성은, 더구나 경력이 없는 여성은 월 100만원 이상을 받을 수 있는 정규직 직장이 없다"고 말했다.
#30대 여성 B씨는 7년 전 대기업 고객지원실에 고졸 사무직 처우로 취직했다. 원래 전문대 졸이었던 B씨는 입사 후 4년제 야간대학에 편입학해 어렵사리 졸업장을 땄다. B씨는 회사 인사과에 정규직인 대졸 사무직으로 처우를 변경할 방법이 없는지 문의했지만 "원래 대졸 사무직에는 여사원을 잘 뽑지 않는다"고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실제로 B씨가 다니는 회사의 대졸 사무직은 대부분 남성이고 사무보조를 주로 하는 고졸 비정규직은 모두 여성이다.
#대기업 마케팅부에서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다 최근 중소기업 정규직으로 이직을 결정한 30대 여성 C씨는 청천병력 같은 얘기를 들어야 했다. 이직 예정인 회사로부터 "부담스러우니 출산 후에 입사하라"는 통보를 받은 것. 회사에 임신 사실을 알린 뒤 연봉 협상을 마친 B씨는 "아직 배가 많이 부르지 않아 임신 얘기를 꺼내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솔직하게 말했다가 오히려 불이익을 받게 됐다"며 "비정규직인 남편의 월급으로는 생활이 빠듯한데 걱정"이라고 했다.
이제 여성은 정규직 채용은 꿈도 못 꾼 채 사회생활을 비정규직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직장 내에서 비정규직 상승도 거의 불가능하다. 출산 등 이유로 정규직으로 다른 기업에 재취업하는 것 역시 쉽지 않다. 2008년 겪은 경제 위기의 부담이 비정규직 여성에게 집중되면서 낳은 결과다.
비정규직 여성에 대한 부담 전가
일자리는 1997년 외환 위기 때는 계층별로 균등하게 감소했다. 그러나 2008년 경제 위기 이후에는 양상이 달라졌다.
통계청의 '연도별 취업자 증감 추이'에 따르면 97년 외환 위기 다음 해인 98년에는 상용직(정규직) 임시직(비정규직) 일용직(비정규직)이 각각 전년 대비 74만8,000명, 19만4,000명, 16만6,000명 감소했다. 하지만 2008년 경제 위기 이듬 해인 2009년에는 상용직이 전년보다 38만3,000명 늘어난 반면, 비정규직은 13만6,000명이 감소(일용직 15만8,000명 감소ㆍ임시직 2만2,000명 증가)했다.
특히 여성의 비정규직화가 뚜렷했다.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민간 연구원)의 김수현 연구원이 4월 발표한 연구보고서 '비정규직의 개념과 경제 위기 이후의 비정규직'에 따르면 2009년 8월 현재 비정규직 가운데 여성이 차지는 비중은 53.5%. 경제 위기 이전인 2006년(51.6%)이나 2007년(51.2%)에 비해 많이 늘었다.
여성은 정규직 비정규직을 합친 전체 일자리 수를 봐도 이번 경제 위기에서 98년 외환 위기 때보다 더 극적으로 몰락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민간 연구원)에 따르면 98년 남성과 여성의 일자리가 각각 64만개씩 똑같이 줄었으나 2009년에는 여성 일자리만 10만개 사라지고, 남성 일자리는 오히려 3만개 늘었다.
비정규직 개념 못 잡는 정부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는데도 정부는 차별 현상을 최대한 축소해 보이고 양적 취업률을 높이는 데만 열중하고 있다.
통계청과 고용노동부 등은 매달 한시적노동자 시간제노동자 비정형노동자 등만을 비정규직으로 잡은 집계와 분석을 발표하고 있다. 하지만 이 집계는 장기임시노동자 등을 포함하고 않아 여성 비율이 갈수록 늘고 있는 비정규직 규모를 제대로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노동사회연구소 추정치에 따르면 2009년 임금근로자 중 비정규직 비중은 51.8%로 통계청 집계(34.9%)보다 17% 포인트 높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임시직(temporary worker)개념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고 있지만 OECD는 임시직을 비정규직의 개념으로 인식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미국 일본 이탈리아 등은 각자 자신들의 기준에 맞춰 비정규직을 파악하고 그 내용을 OECD에 보고하고 있다.
질 낮은 일자리를 양산해 취업률을 양적으로만 높이려는 시도도 문제다. 2009년 본격 증가한 공공근로와 청년인턴제는 단기간에 비정규직만 양산했을 뿐 질 좋은 일자리 창출에 거의 실효성이 없었다는 지적을 여러 차례 받아 왔다.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정부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물난리에 반지하주택만 피해를 입듯 노동유연화에 다른 경제 위기의 피해가 비정규직 여성에만 쏠리고 있다"며 "정규직에만 초점을 맞춰 설계된 고용보험을 개선하고, 소규모 사업장에 주로 근무하는 비정규직 여성을 포괄하는 고용보험 재설계를 비롯한 제2의 사회안전망 구축을 고민해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김청환기자 chk@hk.co.kr
■ 채용 성차별 402건 적발… 50인 미만 사업장 88%
'영업직 남자사원 0명.' '상담직 미혼여성 0명.'
흔히 볼 수 있는 채용광고지만 모두 심각한 성차별적 내용이 담겨 있는 것들이다. 고용노동부는 6월 21일부터 한 달간 일간지와 생활정보지, 인터넷의 직업정보사이트에 게시된 채용광고 1만1,953건을 점검한 결과, 성차별적 조건을 제시해 남녀고용평등법을 위반한 402건(3.4%)을 적발했다고 지난달 23일 밝혔다.
고용부 산하 전국 47개 지방관서 및 민간 단체가 합동 조사한 이번 모니터링에서 적발된 402건의 위반 사례 가운데는 직종별로 남녀를 분리해 모집하는 경우나 여성에게 미혼 조건을 제시하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용모 키 체중 등 신체적 조건을 채용 조건으로 제시하는 경우도 많았다.
사업장별로는 여성과 비정규직을 주로 채용하는 소규모 업체에서 성차별적 채용광고가 가장 흔했다. 적발 업체 402곳 가운데 고용 규모 50명 미만인 사업장이 88.2%나 됐다.
업종별로 보면 제조업(39.6%), 도ㆍ소매업(23.6%) 순이었고 직종별로는 생산직(36.8%), 서비스 판매직(21.4%), 사무직(20.9%) 순이었다.
권영순 고용평등정책관은 "모니터링 결과를 토대로 지속적 홍보 및 지도감독을 펼칠 것"이라며 "모집 및 채용의 성차별적 제도 및 관행을 개선해야 실질적 남녀고용평등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인터뷰/ 박창인 노사발전재단 지원팀장
"불합리한 성차별을 해소하는 것은 결국 기업 경쟁력 향상에도 도움을 준다."
박창인(40ㆍ사진) 노사발전재단 차별없는일터지원단 지원팀장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원래 한국경영자총협회에서 일하던 그는 노사정 합의에 의해 재단 설립이 본격화한 2007년 1월부터 파견근무를 하다 아예 자리로 옮겨 지금은 노사 양측의 공동이익을 위한 일을 하고 있다. 그의 노력이 보태져 지원단이 올해 4월 29일 출범할 수 있었고 지금은 서울, 경기 부천시, 대전, 대구, 경남 창원시, 전북 전주시에 6개의 상담소를 마련해 고용차별 상담과 중재, 교육 및 홍보 업무 등을 하고 있다.
여성과 비정규직에 주로 집중되고 있는 채용차별 문제는 무지에서 오는 경우가 가장 많다는 게 박 팀장의 진단이다. 박 팀장은 "차별인 줄 모르고 여성과 비정규직을 차별하는 사업주나 여성과 비정규직이니 단순업무나 비정규직 처우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근로자 모두 문제가 크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차별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아는 것이 문제 해결의 시작"이라며 "혈액형 인종 성별과 같이 선택할 수 없는 조건에 대한 불평등은 무조건 차별이라는 점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차별 해소만 강조하다 보면 건전한 경쟁의 순기능이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박 팀장은 "절대적 평등만 추구하면 사회가 퇴보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며 "하지만 선택할 수 없는 요소에 의한 불합리한 차별은 결국 기업 경쟁력이나 생산성을 악화한다는 점에서 최소한 이 부분은 개선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김청환기자 ch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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