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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희한한 '동문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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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희한한 '동문 만들기'

입력
2010.09.27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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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同門)은 같은 스승에게서 배운 사람을 말한다. 에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가 증자에게 "내가 동료(群)들을 떠나 혼자 산 지가 오래되었다(吾離群而索居 亦已久矣)"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 한나라의 경학가(經學家) 정현(鄭玄)은 "동료(群)는 동문붕우(同門朋友)를 말한다."고 주해를 달고 있다. '동문'은 한나라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말인 것이다. 뜬금없이 왜 '동문'이란 말을 들먹이냐고? 요즘 동문이란 말의 용법이 하도 희한해서다.

원래는 같은 스승의 제자

학문이 뛰어난 분이 있다. 찾아가 제자가 될 것을 청한 뒤 허락을 받으면, 그 분은 스승이 된다. 다른 사람도 스승을 찾는다. 유성룡과 김성일, 정구(鄭逑)는 퇴계 문하의 고제들이다. 이 분들은 퇴계의 고명한 학문을 듣고 찾아가 스승으로 섬겼다. 10평도 채 되지 않는 도산서당에서 한 스승 아래 학문에 전념했으니, 서로간에 남다른 유대감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관계가 곧 동문이다. 자하가 말한 '동료(群)'도 역시 공자 문하의 동문을 말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동문은 이와 사뭇 다르다. 학생은, 대학에 있는 어떤 분의 학문적 명성을 듣고 학문을 하기 위해 그를 찾는 것이 아니다. 수능성적에 맞추어 대학과 학과를 선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느 교수가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는지도 모른다. 한 해에 수천 명이 입학하는 대학에서는 학년과 전공이 다르면 서로 만날 기회도 없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다. 대한민국의 모모한 대학의 졸업생들은, 전공이 하늘과 땅처럼 다르고, 학교 다닐 때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고, 취미도, 교양도, 재산보유 정도도 다 다르건만, 오로지 상대방이 내뱉는 '모모 대학'이란 소리가 고막을 때리는 순간 그 사람은 '거룩한 동문'이 되고, 두 사람은 졸지에 관포지교로 화한다.

대한민국처럼 급변하는 사회에서는 대학 역시 10년이면 딴판으로 변한다. 10년, 20년 전 졸업한 사람과 나는 오직 '모모 대학'이란 이름만 공유할 뿐, 달리 공유하는 것이 없다. 하지만 전에 몰랐던 10년, 20년 전의 졸업생을 우연히 만나면, 순식간에 둘도 없는 선배와 후배가 된다.

그렇게 '동문'이 된 사람들은, 과거 한 스승 아래서 학문에 전념하던 시절은 결코 회상하지 않는다. 하는 일은 따로 있다. 무언가 이익이 생기는 기회가 닿으면 동문이니, 선배니, 후배니 하면서 밀고 당겨 주는 것이 그들의 일이다. 내가 경험한 대학의 경우를 예로 들어본다. 교수 공채 때 '동문 후보자'는 일면식도 없지만 무조건 당기고 본다. 총장 학장 선거가 있으면 후보자의 인격과 공약보다 '동문'이란 명사가 당선에 더 위력적인 구실을 한다.

자신과 같은 학교를 다닌 사람을 만나면 반갑기 마련이다. 그것까지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까지다. 동문이 패거리를 만들어 이익을 보려는 구실이 되면 동문이란 말의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현실은 딴판이다. 몇몇 소수 명문대학은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패거리를 생산해 내는 권력기관이 된 지 오래다. 그 대학의 졸업생끼리 패거리를 이루어 권세와 이익을 누리는 것을 은폐하기 위해 '동문'이란 명사를 동원하는 것일 뿐이다.

이젠 권세ㆍ이익의 고리로

동문을 강조하기로 유명한 어느 사립대학이 그 대학의 이름이 들어간 학과목까지 개발해 강의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 강의를 담당하신 분은, 입학도 하기 전에 그러니까 한 시간의 강의도 듣지 않은 김연아 선수가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자 자기 대학 정신을 주입한 결과라는 희한한 말씀을 하신 분이다.

하루도 같이 학교를 다니지 않아도, 한 번도 같이 강의를 듣지 않아도 오직 그 대학의 이름만으로 동문이 된다는 것이니, 너무나 희한한 법칙이다. 하지만 수치스럽지 않은가. 이 희한한 동문 만들기를 타파하지 않으면 '공정한 사회'는 아마도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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