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왕모(41ㆍ사진) 시인이 두 번째 시집 (문학과지성사 발행)를 냈다. 1994년 등단, 3년 뒤 첫 시집 을 내며 범속함에서 강렬하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포착하는 특유의 관찰력으로 주목받았던 그가 13년 만에 묶어낸 시집이다. 연씨는 “결혼, 종교, 직업 등 너무나 많은 삶의 변화가 닥친 30대를 건너오면서 축적된 시들”이라며 “그동안 발표한 110여 편의 시 중에서 62편을 추렸다”고 말했다.
그런 만큼 이번 시집의 분위기는 시인 스스로 ‘20대의 혈기와 광기, 폭발하기 직전의 에너지로 끝없이 내부를 천착’한 결과물이라고 설명한 첫 시집과는 사뭇 다르다. 격정에 사로잡힌 채 자기 안에서 칩거하던 시인은 이제 바깥으로 나와 세계를 떠돈다. 이런 전환은 ‘스스로 멎어 있음은 혼돈을 부르는 것이 아닌가’(‘늪의 입구’에서)라고 자문하는 시인의 실존적 선택이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그의 입에서 밧줄이 나온다/ 눈을 감고 그는 고통스럽게 밧줄을 게워낸다/ 방 안을 가득 메운 밧줄이 꿈틀꿈틀 문을 나선다/ 거리로 나온 밧줄이 터널을 바라본다’(‘새벽 세 시의 자명종’에서) 모두 곤히 잠든 시간에 시인을 깨워 길로 이끄는 밧줄은 그의 내면에서 나온 고통의 산물이다. 피로와 고통을 참으며 밧줄을 붙잡고 터널로 들어가는 것, 그것은 미지의 세계에 바투 다가서 타인의 처지를 이해하려는 윤리적 행위다.
다큐멘터리 감독이기도 한 연씨는 미얀마, 팔레스타인 등 분쟁 지역을 비롯해 유럽, 중앙아시아 등 각처를 돌며 타인의 삶을 응시하는 것으로 내면의 윤리적 요청에 부응한다. ‘이른 아침부터 총성이 푸르다/ 누군가의 죽음이/ 내/ 곁에서 명료하다// 총에 아비를 잃은 아이들이/ 총을 가지고 논다/ 복수는 훌륭한/ 놀이의 목적/ 닭 모가지 비틀면서/ 아비의 죽음을 삼킨다/ 질긴 힘줄과 구린 내장을 씹으며/ 배신과 모욕을 삼킨다’(‘카렌의 땅’에서)
그의 관심사가 문명 전반으로 번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실체 대신 부유하는 이미지와 대면하는 오늘날의 삶을 그는 시 ‘전파의 제국’에서 재치있게 꼬집는다. ‘마을에서 뱀이 사라진 이후/ 땅꾼의 행방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 먼지 속 깊이, 땅의 온기 있는 곳, 아직/ 기어다니는 뱀/ 누군가/ 보았다 하지/ 선명하게, 컬러로,/ 꿈속에서’
첫 시집을 책장에 인두 자국을 내고 칼등으로 종이를 찢은 채 출간해 놀라움을 주기도 했던 연씨는 이번 시집에서도 행과 연의 파격적인 배열, 글자체 및 글자 크기의 변화, 삽화 삽입 등의 형식 실험을 선보인다. 그는 “첫 시집에서의 시도는 인쇄된 활자가 아닌 다른 ‘언어’를 통해 독자와 직접 소통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던 것”이라며 “언어의 영역 확장에 대한 관심의 결과”라고 말했다. 이번 시집에 실린 시 ‘뭘 찾는데요?’도 그의 파격을 보여준다. 웹 문서를 만드는 프로그래밍 언어인 HTML로 작성한 시다. 실제 컴퓨터에 입력해 실행해보는 것도 이 시를 감상하는 한 방법이다.
이훈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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