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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준의 문향] <51>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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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준의 문향] <51>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

입력
2010.09.26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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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은 경술국치(庚戌國恥) 100년이면서, 안중근(安重根ㆍ1841~1910) 의사와 매천 황현(梅泉 黃玹ㆍ1855~1910)의 서거 100년을 맞는 역사의 한 해이다.

경술년 전해(1909)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는 경술년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동아시아 평화를 외치며 일본 국가 권력에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10일에는 전라도의 이름난 선비 매천이 나라 잃은 슬픔을 곱씹으며, 절명사를 남기고 자결했다.

이때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가 '동양 평화'를 깨트렸기 때문에 죽였다고 당당히 공언하고, "동양평화가 무엇이냐?"고 묻는 일제의 검찰관에게 "아시아 각국이 모두 자주적으로 독립하는 것"이라고 일갈해서 스스로의 평화의 정신을 재천명했다.

그는 아시아 각 나라가 자주적으로 독립하는 동양 평화를 위해서, 스스로 갇혔던 역사의 땅 뤼순의 중립화론을 비롯하여, 동양 3국 평화회의와 공동 군단 창설, 공동 경제개발, 공동 화폐 발행과 함께, 로마 교황청 인증론까지 평화의 동아시아 공동체를 꿈꿨다.

안 의사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그래서 동양평화를 로마 교황청의 중재까지 생각했을 터이다. 그가 최후를 마친 뤼순감옥은 독립운동가 이회영과, 구한말 언론인 단재 신채호 선생이 1936년 순국 때까지 9년을 갇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의 서거 100년, 그의 동양 평화사상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동북아시대 구상으로 세계적으로 주목된 바 있고, EU(유럽연합) 정신의 선편으로 평가되며, 경술국치 100년의 민족사를 넘어, 새로운 국제 시대의 인류의 평화사상의 한 디딤돌이 되었다.

한편 매천은 망국의 소식이 시골에까지 전해진 경술년 자결을 결심하고 "나라가 망하는 날에 선비 한 사람이라도 죽어야 할 인(仁)을 이루리라"고 하고 절명사(絶命辭) 4수를 남기고 죽음을 택했다. 이름 없는 무지한 백성들까지라도 나라가 망하는 소식에 목숨 바쳐 싸우는 때를 만나 "글 아는 사람구실 참으로 어렵도다"고 한탄하며, 아편을 삼켜 죽어서 나라를 구했다.

"새와 짐승도 갯가에서 슬피 우는데/ 무궁화 나라는 이미 사라졌는가/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옛일 회상하니/ 글 아는 사람구실 참으로 어렵도다(鳥獸哀鳴海岳嚬 槿花世界已沉淪 秋燈掩卷懷千苦 難作人間識字人](의 둘째 시)

김택영(金澤榮)ㆍ이건창(李建昌)과 함께 조선 말 3대 시인으로 추앙되는 황현의 은 1864년부터 1910년까지를 기술한 비판적 최근세사로, 그가 순국한 이듬해(1911) 일제의 검열을 피해 중국에서 간행되었다. 이 책의 편집자로 매천과 평생토록 가장 친했던 김택영은 '본전(本傳)'에서 매천의 문장이 하늘을 움직였다고 평하여 역사적 평가를 내린 바 있다.

그리고 그는 이 때 나라가 망하는 일에 의분을 참지 못해 죽은 당대의 의인 15사람의 이름을 열거하여 함께 역사에 남겼다. 금산 군수 홍범식, 판서 김석진, 참판 이만도에서 여러 지방 유생과 반씨 성을 가진 환관 한 사람까지.

동국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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