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일본의 댜오위다오(釣魚島), 센카쿠(尖閣) 열도 영토분쟁이 중국의 완승으로 끝났다. 길게 끌면 둘 다 손해인 분쟁에서 '문명국' 일본이 양보했다고 보는 관점도 있지만, 일본이 힘이 부치지 않았다면 과연 그렇게 했겠는가. 올해 세계 2위 경제대국 자리가 뒤바뀐 것과 함께 두 나라의 위상 차이는 더 커지게 됐다.
오랜 굴욕 되갚기 나서
이번 사건은 전통적으로 대륙국가였던 중국이 해양국가로 나가는 길목에서 일어난 것이다. 물론 과거에도 중국이 해양국가였던 적이 있다. 명나라 초기 영락제(永樂帝) 시대 정화(鄭和)의 남방 원정 때가 그랬다. 15세기 초 30여 년간 7차에 걸친 원정은 원정대원이 3만 여명에 이르고, 큰 함정은 길이 120m로 사상 최대의 목선이었다. 이 원정에서 정화 자신은 아라비아 반도에 이르고, 부하들은 지금의 아프리카 모잠비크까지 갔다.
당시 일본 무로마치(室町) 막부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滿)는 중국에 조공하고 일본국왕 책봉을 받았다. 같은 시기 서양에서는 포르투갈의 항해왕 엔리케가 대항해시대를 열고 있었지만, 아직 아프리카 서북 해안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60여 년 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원정대원은 100명이 못 되었고, 기함 산타마리아호는 길이 26m에 배수톤수 100톤 정도였다.
그러나 중국은 대항해의 역동성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대륙국가로서 해외 원정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동양이 서양에 뒤떨어지기 시작한 것은 대개 이 무렵이다. 그 결과는 서세동점(西勢東漸)으로 나타났다. 19세기에 일본은 서세동점에 잘 적응한 반면 중국은 그렇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지난 170여 년간 중국과 일본의 위상은 바뀌었다.
현대 중국은 어떻게 해양국가로 나오게 되었나. 19세기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중국은 반식민지 상태로 떨어졌다가 20세기 전반에 일본의 전면적 침략을 받게 되었고, 그 결과 공산혁명이 일어났다. 혁명 후 중국은 "우리 방식대로"를 외쳤지만 결과는 재난이었다. 결국 중국은 1978년 이후 개혁개방으로 세계자본주의와 통합함으로써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중국의 통합 방식은 후진국으로서 세계자본주의의 기성질서를 받아들이고 그에 끼어드는 것이었다. 그런 방식으로 30여 년 간 선진국의 시장 기술 자본을 이용하여 고도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러다 이제 힘이 붙었으니 질서 자체를 바꾸어 보고 싶은 것이다. 이것이 중국이 해양국가로 나오게 된 배경이다. 요즘 중국이 정화의 남방원정 기억을 되살리고 있는 것은 이런 움직임과 무관하지 않다. 일본과의 이번 분쟁도 그런 맥락에서 일어난 것이다.
문제는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면서 형성된 중국인의 정신세계다. 중국 역사상 지난 170여 년만큼 굴욕을 당한 적은 없었다. 과거 북방민족에게 여러 번 정복당했지만, 서양처럼 군사력뿐 아니라 문화적으로 압도당한 경우는 없었다. 일본처럼 정치의 중심이 바깥에 있는 나라의 침략을 받은 적도 없었다. 지난 30여 년간 후진국으로서 세계화를 하면서 당한 모욕도 있다.
주변국으로 확대할 우려
이처럼 위대한 과거를 가진 나라가 굴욕을 당한 뒤 다시 부강해지면 어떻게 되는가. "당한 모욕은 되갚아주겠다"는 식이 되지 않겠는가. 그 역사적 선례가 있다. 19세기의 독일이다. 19세기 독일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헤겔 철학은 바로 그런 개념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독일의 보복 대상은 1차적으로 자신을 괴롭혀 왔던 프랑스였지만, 결국 모든 주변국가로 확대되었다.
중국도 1차적으로는 자신을 침략했던 일본이 앙갚음의 대상이 되겠지만 다시 주변국가로 확대되지 않겠는가. 그 대상에는 과거 일본의 침략에 같이 맞서던 것보다 최근 '졸부' 모습을 보인 기억이 더 생생한 한국도 빠져 있을 것 같지 않다.
이제민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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