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23일 일본에서 별세한 소설가 손창섭(1922~2010)씨는 여전히 미지의 작가다. ‘비오는 날’ ‘잉여인간’ 등 그가 1950년대에 발표한 단편소설은 일찌감치 한국 전후문학의 대표적 수작으로 평가 받았지만, (1959)부터 (1978)까지 그가 1950년대 말 이후 신문 연재에 전념하며 남긴 10여 편의 장편소설은 문학비평에서 논외의 대상일 뿐더러 태반이 책으로 묶이지도 않았다.
특히 그의 문학을 깊이 이해하는 데에 필수적인 생애 연구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평양 태생인 그의 가족사와 만주, 일본을 떠돌았던 등단 이전의 성장기는 물론이고, 작가로서 확고한 명성을 얻고도 도일을 결행한 이유와 이후의 행적에 관해서도 밝혀진 것이 매우 적다. 이런 가운데 단편적이나마 그의 생애에 관한 증언들이 나오고 있어 관심을 끈다.
이영희(79) 포스코 인재개발원 교수는 1973년 12월 일본에 건너간 손씨를 현지에서 직접 만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당시 한국일보 기자로 손씨와 친분이 있었던 이씨는 1975년 도쿄에 있는 그의 자택을 찾아가 소설 연재를 제의했고, 손씨는 이를 받아들여 이듬해 1월1일부터 10개월 동안 한국일보에 재일동포의 애환을 다룬 장편 을 연재했다. 손씨가 장편 (1970) 연재 이후 5년 만에 쓴 신작이었다. 이후 그는 원나라 치하 고려를 무대로 한 장편 을 한국일보에 연재(1977년 6월~1978년 10월)한 뒤 더 이상 소설을 발표하지 않았다.
이씨는 “소설 연재를 부탁하자 손씨는 처음엔 ‘여기까지 와서 연재를 하겠냐’고 하다가 거듭 권하자 어렵지 않게 수락했다”며 “손씨와 부인(우에노 지즈코씨) 단 둘이 나를 맞았고, 집 내부는 소박했지만 궁핍한 느낌은 없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손씨가 연재를 앞두고 한국일보와 가진 인터뷰(1975년 12월17일자)에서도 당시 만 2년이 된 그의 일본 생활을 엿볼 수 있다. 이 기사는 “손씨는 지난 2년 간 도쿄 교외의 조그만 아파트에서 일체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살아왔다”며 “집안 살림은 미용사 자격을 가진 일본인 부인에게 맡기다시피하고 도쿄 내 각 도서관에 도시락을 싸들고 출근하다시피하며 새로운 소설의 구상과 취재에 골몰해왔다”고 전했다. 손씨는 “섬나라인 일본과는 생리적으로나 체질적으로나 맞지 않아 일본에 영주할 생각은 결코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씨는 또 “한국에 살 적에 손씨는 부인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걸 유난히 꺼렸다”고 말했다. 손씨가 기자를 집에 들이지 않으려고 ‘어디어디 골목, 몇 번째 전봇대 앞에서 만나자’는 식으로 약속을 하곤 해서, 이씨도 일본에 가서야 그의 부인을 처음 만났다고 한다. 손씨가 도일을 결심한 이유와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있는 대목이다.
한편 문학평론가 유종호(75)씨는 최근 발행된 월간 ‘현대문학’ 10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1992년 도쿄대 방문연구원으로 일본에 체류할 당시 믿을 만한 재일동포 대학원 학생으로부터 ‘손창섭이 기독교 계통 이단 종파의 열렬한 신자가 돼서 거리에서 전단을 나눠주고 이따금 한국대사관이 있는 건물에 나타나 계단에서 통곡을 하거나 큰 소리로 횡설수설한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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