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스웨덴 스톡홀름의 왕립 오페라극장. 지난해 유럽 전역에서 열린 발레 뤼스(모던발레의 기점이 된 러시아 발레단) 창단 100년 기념 헌정 공연이 이곳에서는 해를 한참이나 넘기고도 계속되고 있었다. 이날 스웨덴 왕립발레단이 공연한 작품은 '볼레로' '결혼' '봄의 제전'.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모리스 라벨 등 발레 뤼스를 대표하던 예술가들의 작품인데, 빠른 템포에 절도있는 동작을 선보인 '결혼'에서 반가운 두 얼굴이 보였다. 한국인 솔리스트 전은선(36), 남민지(26)씨다.
"봄에 초연했을 땐 반응이 폭발적이었는데, 벌써 스무 번쯤 공연해서인지 오늘은 관객이 좀 적었죠?" 남씨의 말에 전씨는 "처음에는 허공에서 남성 무용수를 향해 떨어지는 동작이 무서웠고, 온 몸에 시퍼렇게 멍이 들기도 했다"면서 "23분 동안 쉴 틈 없이 이어지니까 그만큼 달리기하는 것 보다 더 힘들다"며 빙긋 웃었다.
"한국에 있을 때는 할 수 없었던 작품이죠. 한국은 아직도 러시아 클래식 발레를 주로 하니까요."(전은선) 유니버설발레단에서 주역으로 활동하던 전씨는 2002년 동양인으로는 처음 스웨덴 왕립발레단에 입단했다. 그는 "한국에서 클래식 작품은 군무부터 주역까지 안 해본 역이 없을 정도로 많이 했다. 이곳에서는 매달 클래식과 모던을 번갈아 공연하니 새 작품을 만날 때마다 즐겁다"고 했다. 10월에 그와 남민지씨는 '백조의 호수'에 출연한다.
남씨는 독일의 에센 발레단과 드레스덴 발레단을 거쳐 2006년 이곳에 입단했다. "비엔나 오페라발레단도 생각했는데, 언니(전은선) 때문에 스웨덴에 대한 정보가 좀 더 있었죠. 무대에서 노련함이 돋보이는 언니 덕에 동양인에 대한 차별도 안 받은 것 같아요." 남씨의 이 말에 전씨는 "춤을 재미있게 잘 추는 민지를 보면 내가 다 뿌듯하다"며 친자매 같은 모습을 보였다.
4년 넘게 스웨덴 왕립발레단에서 활동해온 이들은 이곳의 장점으로 다양한 레퍼토리와 훌륭한 대우를 꼽았다. 특히 전씨는 "한국에서는 내 나이에 현역으로 활동하기 어렵다. 하지만 나와 민지는 여기서 종신단원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42세까지 활동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출산 후 390일 동안 유급 휴직이 가능한 것도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이들은 외국 발레단 생활이 결코 만만하지는 않다고 했다. 타향살이의 외로움은 물론이다. "세계적인 콩쿠르에 입상했든 교수님의 총애를 받았든, 외국에서는 안 통해요. 처음부터 시작이죠." 남씨의 말에 전씨는 "한국 무용수는 기량은 좋지만 테크닉을 중시하는 탓에 동시대 발레를 하기에는 표현력 등이 떨어져 고생하기 쉽다. 나도 그랬다"고 거들었다. "이곳에서는 무조건 호리호리한 몸을 바라는 것도 아녜요. 근육 있고 몸을 잘 쓰는 사람을 선호하죠."(남민지)
스웨덴을 비롯해 핀란드, 노르웨이 등 북유럽에만 남아있는 종신 발레단원 계약은 안정적 삶을 보장하지만 한편으로는 갑갑할 수도 있을 터. 아직 20대 중반인 남씨에게는 더욱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남씨는 "3년 동안은 다른 발레단에 입단하거나, 전혀 다른 활동을 하는 것도 허락된다"면서 "영국이나 미국처럼 다른 스타일의 발레를 배우러 다녀올 생각"이라고 말했다. 전씨는 "은퇴를 앞두고 발레학교에서 공부한 뒤 지도자로 변신할 생각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솔직히 스웨덴 왕립발레단 명성이 예전 같지는 않아요. 경제위기 이후에는 외국 투어도 많이 못 갔거든요. 그렇지만 여기서는 일이 아니라 정말 즐거워서 춤을 춰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것 아닐까요?"(전은선)
스톡홀름= 글ㆍ사진 김혜경기자 thank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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