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수난의 그 길,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ㆍ'십자가의 길'이라는 뜻의 라틴어)를 찾았을 때 밀려온 것은 경건함이 아니라 낭패감이었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처형지인 골고다 언덕까지 걸었던, 기독교 최대 성지라 할 만한 이 길은 떠들썩한 시장통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었다. 폭 2~3m의 좁은 길 양편으로 늘어선 것은 무슬림 가게들. 분주히 오가는 상인과 행인들의 무심한 눈길 속에 예수 수난의 흔적을 차분히 볼 여유도 찾기 어려웠다. 어떤 이에겐 성스러운 공간이겠지만 다른 이들에겐 그저 생활의 장일 뿐이다.
지난 5일 새에덴교회(담임목사 소강석) 순례단과 함께 찾은 예루살렘 고성(old city). 안내를 맡은 손문수(37ㆍ히브리대 박사과정) 목사는 "일반 신도들도 처음엔 뜻밖의 시장 분위기에 실망감을 많이 느낀다"고 말했다. 이 낭패감은 그러나 시작에 불과하다. 예루살렘 고성에 서린 역사와 그 자취를 밟아볼수록, 종교의 근본 역할에 대한 당혹감이 번지기 때문이다. 가장 성스러우면서도, 그로 인해 가장 첨예한 종교간 갈등의 역사가 얽히고 설켜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 쓰린 대립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둘레 4,000여m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예루살렘 고성은 면적이 고작 1㎢에 불과하지만, 수천년의 역사 속에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모두가 자신들의 성스러운 땅이라고 여겨온 곳이다. 한 뿌리에서 나오긴 했으나 서로가 서로를 경멸하며 상대를 탄압하고 학살했던 유혈의 장이기도 하다. 셀 수 없는 수많은 전쟁이 이 곳을 덮쳐 성은 무너지고 다시 짓기를 여러 차례, 그 긴장의 역사를 반영하듯 고성 내 시가지는 유대인, 무슬림, 기독교인, 아르메니아인의 4개 거주구역으로 나눠져 있다.
고성 핵심부는 옛 예루살렘 성전 터인데 지금은 금빛 찬란한 황금돔의 이슬람 사원이, 그 앞에는 유대교 최대 성지인 '통곡의 벽'이 자리잡고 있다.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성지가 같은 장소에 맞물려 있다는 게 갈등의 씨앗이라면 씨앗이다.
기원전 10세기께 솔로몬 왕 때 세워졌다가 기원 전후 헤롯 시대에 재건된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들의 최대 성소이지만, 기원후 70년 로마에 의해 완전히 파괴돼 서쪽 벽 일부만 남았다. 예루살렘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이 그 후 이 벽 앞에서 옛 성전을 기억하며 통곡했다 해서 이름도 '통곡의 벽'. 그 앞에는 지금도 기도를 올리는 유대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검은 모자와 검은 옷 차림의 유대인들이 몸을 앞뒤로 떨며 토라(모세오경)를 읊조리는 모습에서는 자못 소름 돋는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벽 뒤에 세워져 있는 이슬람 사원 역시 종교적 의미가 이에 못지않다. 7세기 예루살렘을 점령한 아랍인들은 이 성전에 모셔진 거룩한 바위를 무함마드가 신의 계시를 받기 위해 하늘로 올라간 곳으로 여겼다. 무함마드가 승천할 때 바위도 함께 들려 올려가자 발로 눌러 놓았는데, 그 발자국이 바위 한 쪽에 남아있다고 전한다. 아랍인들은 이곳에 각각 황금돔 사원, 은빛돔 사원으로 불리는 '바위 돔(Dome of the Rock) 사원'과 '알 악사(Al Aksa) 사원' 두 곳을 세워 메카와 메디나에 이은 이슬람의 세 번째 성지로 삼았다. 바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동예루살렘 영유권 분쟁의 역사적 출발점이다. 예루살렘 고성이 속한 동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이 1967년 6일전쟁으로 강제 점령했으나, 이 두 사원만은 현재 요르단 정부가 관리하며 무슬림 외에는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
이 분쟁에 기독교인도 죄 없다 할 수 없다. 기독교인에겐 고성 내 예수 수난의 길과 골고다 언덕이 성지다. 11~13세기 서방 기독교 국가들이 성지 회복을 외치며 벌인 십자군 전쟁으로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세 종교의 어머니로 불리는 예루살렘은 그렇게 역사적 원한까지 두 겹 세 겹 겹쳐지면서, 평화를 갈구하는 종교적 성지이면서도 평화와는 가장 멀리 떨어져 버린 역설의 땅이 된 것이다.
무슬림 거주구역에서 시작되는 십자가의 길이 끝나는 곳은 기독교인 거주구역에 있는 성묘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 예수의 십자가 처형지로 여겨지는 곳에 세워진 교회다. 이 교회 역시 4세기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건립됐다가 이슬람에 의해 파괴되고 십자군에 의해 재건되는 등의 진통을 겪었다.
세 종교가 얽히고 설킨 갈등을 벌이기 훨씬 전, 예수가 택한 방식은 달랐다. 유대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던 당시, 예수의 방식은 무력으로 저항하고자 했던 젤롯당의 무장투쟁 노선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에세네파처럼 종교적으로 은신했던 것도 아니며 바리새파처럼 말로만 비판했던 것도 아니었다. 예수는 고난 당하는 이들 편에서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스스로 죽는 길을 택했다. 말하자면 희생을 통한 승리, 기독교 케리그마에서 보자면 대속과 부활이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원한의 연쇄고리를 끊는, 그리고 지금의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아마도 가장 숭고한 길이겠지만 그 길을 진정으로 따르는 이들이 많지 않다는 게 늘 문제 아니던가.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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