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전날, TV 뉴스 속의 광화문은 물바다였다. 나는 그 참괴한 풍경 앞에서 "아아, 광화문!"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광화문을 조선 태조 4년, 1395년에 세워진 경복궁의 정문이라고 말하지 마라. 이제는 서울 종로구 세종로 1-57, 수도 서울의 중심. 광화문은 대한민국을 여는 문이 아닌가.
나는 '왕의 큰 덕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광화문 앞으로 강물처럼 흘러가는 빗물에 비친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진짜 얼굴을 보았다. 아무리 기습폭우라 하지만 불과 몇 시간의 비로 이 나라 수도의 자존이 한낱 '수영장'으로 전락한다는 것은 서울을 수도로 삼고 사는 국민에 대한 모독이었다.
오는 11월 서울 G20 정상회의를 앞둔 세계의 정상들이 서울을 어떤 도시로 이해하겠는가. 치산치수(治山治水)는 국가를 다스리는 기본이라고 했다. 조선조 600년과 많은 공화국이 이어져 오는 동안 이처럼 부끄러운 물난리가 또 있었는지 궁금하다. 더구나 하늘천기를 척척 읽어내는 21세기에 희극 같고 비극 같은 물난리라니.
광화문에 동상으로 모신 명랑대첩의 이순신 장군께서, 측우기를 만드신 세종대왕께서 이 작태에 얼마나 민망하셨을까. 비 그치고 광화문이 하루 만에 말끔히 제 모습 찾았다고 홍보하지 마라. 그 물 낮고 가난한 곳으로만 흘러들어 대책 없이 젖어버린 반지하에 사는 내 누님의 눈물 아직 마르지 않았으니.
정일근 시인·경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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