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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의 나의 꿈 나의 도전] <62> 중간평가에서의 야합 - 보수대타협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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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의 나의 꿈 나의 도전] <62> 중간평가에서의 야합 - 보수대타협의 시작

입력
2010.09.19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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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들어 사회 각 부문에서 민중투쟁이 격화됐다. 물론 87년 6월 민주항쟁 후 '7,8,9월 노동자대투쟁'과 같은 노동자들의 신규조직과 파업투쟁처럼 농민과 도시빈민 교사 교수 법조인 언론인 문인 예술인 여성 종교인 등 사회의 전 부문이 자기들의 권익확보나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단체를 결성하고 집회나 농성을 벌인 일이 많았다.

그렇지만 그 해에는 대통령선거가 있어 상당히 자제된 측면이 있었고, 88년에는 87년 대선에서의 패배로 인한 사기저하와 새로 들어선 노태우정권에 대한 일말의 기대, 그리고 올림픽경기 때문에 소강상태를 유지했었다. 그러나 89년에 접어들어서는 대선패배에 따른 사기저하도 극복되고, 또 노태우정권에 대한 기대가 무산된 것은 물론 오히려 민중운동이 심각한 탄압을 받고 있어 민중투쟁이 격화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농민들의 투쟁이 치열했다. 농축산물의 수입개방에 따른 농업문제의 정치성과 전국성이 강화된 결과이기도 하지만 전국 규모의 농민투쟁이 강력히 전개됐다. 내가 교도소에 있을 때인 88년 11월 2만여 명의 농민이 서울 한복판인 여의도 광장에 모여 농민생존권보장과 농업발전대책을 요구하는 집회가 열렸는데,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그 동안 농민들이 온갖 고통을 겪으면서도 운명 탓으로 돌리거나 정부를 원망할 뿐 정부의 농업정책을 바꾸기 위해 투쟁하지는 못했는데 이렇게 전국에서 2만여 명이 서울까지 와서 자신의 주장을 당당히 밝히니 얼마나 감격스럽고 존경스러운 일인가! 특히 나는 형님들이 정부의 잘못된 농업정책 때문에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서 민주화운동에 뛰어든 사람이라 농민들의 대규모 상경투쟁이 더욱더 감격스러웠다.

그런데 마침 내가 전민련 활동을 하고 있을 때인 89년 2월 여의도에서 대규모 농민집회가 열렸다. 나는 만사를 제쳐두고 참석했다. 추운 날씨에도 발 디딜 틈이 없이 빽빽이 모였고, 김해 고향마을 사람들도 있었다. 농민 2만여 명의 모습도 장관이었지만 이들이 타고 온 관방버스의 행렬 또한 장관이었다. 우리 농민들이 이렇게 관광버스를 타고 서울까지 와서 투쟁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민중주체요 민중해방의 시작이었으니까.

전민련은 민중투쟁을 지원하는 일로 눈코 뜰 새가 없었다. 물론 광주학살과 5공비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 같은 민주화 조치를 외면하는 노태우정권에 대한 공세 또한 늦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노태우정권의 퇴진을 촉구하는 집회를 잇달아 열면서 전민련에 가입하지 않은 단체들을 참여시켜 '노태우정권 퇴진을 위한 공동투쟁본부'를 결성해서 노태우정권 퇴진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전민련을 비롯한 민중운동진영이 이렇게 민중투쟁을 격화한 것은 노태우정권을 반대하는 입장이어서만이 아니라 노태우정권이 민주화조치를 외면한 채 민주화와 민중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는 민중운동을 탄압했기 때문이었다.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등도 엄청난 탄압을 받아 구속자가 속출했지만 전민련의 조국통일위원장 이재오도 범민족대회 문제로 구속되었다.

무엇보다 민주화의 핵심적 과제인 5공 청산문제가 흐지부지되고 있는 게 문제였다. 광주특위와 5공특위가 설치돼 5공인사들도 청문회의 증인출석이나 검찰조사 등으로 상당한 괴로움을 겪었으나 민주세력의 입장에서 보면 변죽만 울리다가 유야무야 끝내려 하는 것 같았다. 물론 그 뒤 광주학살과 5공비리의 주된 책임자는 구속돼 처벌받았고 또 5공청산문제로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지불했는데도 5공청산은 제대로 안 된 듯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왜 이렇게 됐을까? 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민주정부가 들어서서 5공청산을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때문이었다. 즉 정통성 있는 민주정부가 들어서서 광주학살과 5공비리에 대해 문책할 건 문책하고 용서할 건 용서했다면 당사자의 고통도 오히려 적고 사회적 비용도 줄이면서 민주화도 이루고 민족정기도 확립했을 것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제대로 처벌하지 못함으로써 민족정기도 확립하지 못하고 대한민국의 정통성 시비를 불러일으켜 엄청난 국가적 손실을 초래했듯이 민주헌정을 파괴하고 양민을 학살한 쿠데타세력을 제대로 처벌하지 못함으로써 사회정의도 구현하지 못하고 사회적 갈등만을 불러일으켜 엄청난 국가적 손실을 초래했던 거다.

요즘 '공정한 사회'가 외쳐지고 있는데, 이것은 지금까지 공정한 사회가 아니었음을 말해주는 것인 바, 이처럼 공정한 사회가 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친일파를 제대로 척결하지 못하고 5공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데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민주정부를 수립할 절호의 기회를 놓친 양 김씨의 역사적 죄과는 두고두고 비난 받을 것이다.

3월 중순에 접어들자 중간평가문제가 최대의 현안이 되었다. 참으로 기이하게도 노태우정권은 중간평가를 할 듯이 설치고 중간평가를 통해 노태우정권을 물러나게 하고서 집권해야 할 야당은 중간평가를 반대했다. 얼핏 보면 중간평가에서 집권세력이 이길 것 같으니까 그런 것 같지만 사실은 중간평가를 회피하기 위한 대국민 사기극이었다.

노태우정권 쪽에서 중간평가를 안 하겠다고 하면 국민과 재야가 반발할 것 같으니까 노태우정권은 중간평가를 하겠다고 하고 야당이 이를 반대하는 모양새를 갖춘 거다. 한마디로 '짜고 치는 고스톱'이요 '보수대타협'이었다.

여기다가 김대중은 여소야대 정국에서의 제1야당 총재를 즐겼고 김영삼과 김종필은 '3당합당'을 모색하고 있었으니, 이들이 노태우정권을 퇴진시킬 중간평가가 이루어지기를 바랐을 리 없다. 이 무렵 김대중총재는 노태우대통령으로부터 20억 원을 받았다고 한다.

전민련은 중간평가를 통해 노태우정권을 퇴진시킬 방침을 정하고 3월 19일 한양대 운동장에서 '노태우정권 퇴진을 위한 공동투쟁본부' 주최로 '노태우정권 불신임선포식'을 개최했다. 그 동안 중요 문제에서 재야민주세력이 김대중과 다른 입장을 취하긴 어려웠는데도 전민련은 다른 입장을 취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문익환목사의 방북사건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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