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감독 하면 아마도 '어렵다' '재미없다'는 생각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19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이후 평단의 주목을 받으며 명성을 쌓아왔지만 그의 영화는 흥행과 거리가 멀었다. 이해되지 않는 등장인물들의 돌출 행동, 느린 전개 등은 그의 영화를 무조건 어렵고 재미없다고 여기게 만들었다. 그는 과연 대중성과는 거리가 먼 감독일까.
'옥희의 영화'는 홍 감독이 자신의 스타일을 지키면서도 대중을 향해 조금씩 다가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람의 행동에 대한 집요한 관찰과, 삶에 대한 무거운 질문은 더욱 예리하고 묵직해졌지만 대중들이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넓어졌다. 누구나 공감할 유머가 주요 재료로 쓰이고, 서술도 친절한 편이다. '홍상수 영화는 어렵다'는 몰라도 '재미없다'는 편견은 유쾌하게 날릴 듯하다. 부조리한 현실, 사람의 복잡한 감정을 차가운 웃음으로 풀어내며 짠한 여운을 남긴다.
상영시간 80분의 '옥희의 영화'는 네 개의 에피소드로 나눠져 있다. 각 에피소드는 별개의 단편영화처럼 독립성을 지니면서도 기이하게도 하나의 이야기인양 느슨하게 묶여있다. 투박한 모양의 변신합체로봇을 보는 듯하다고 할까.
헐거운 이야기의 틀 안에서 네 에피소드의 주인공인 문성근(송 감독 또는 송 교수, 나이 든 남자) 이선균(진구 또는 젊은 남자) 정유미(옥희)는 중년남자와 남녀 대학생 등으로 각각 등장해 삼각 연애를 펼친다. 이들은 동일인인 듯 하면서도 전혀 다른 인물처럼 보이는 역할을 각각 연기한다. 마치 삶이 매일매일 반복되면서도 조금씩 차이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첫 번째 에피소드 '주문을 외울 날'은 30대 독립영화 감독 진구가 영화 상영회에서 "감독님과 사귀다 헤어진 뒤 폐인이 된 친구를 알고 있냐"는 한 관객의 돌발적 질문을 받고 진땀을 빼는 과정을 블랙 유머로 그렸다. '키스왕'은 대학생 진구가 자신의 학과 송 교수와 몰래 사귀는 동급생 옥희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결국 잠자리까지 함께 하게 되는 과정을 묘사한다. '폭설 후'는 폭설로 겨울 계절학기 강의에 학생들이 나오지 않자 크게 실망한 송 감독이 시간강사를 그만두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마지막 에피소드 '옥희의 영화'는 사귀던 나이 든 남자, 젊은 남자와 함께 1년 간격으로 아차산을 찾은 옥희가 과거를 영화적으로 재구성한 화면을 보여준다. 같은 사물에 대한, 나이 든 남자와 젊은 남자의 각기 다른 인식과 사고 등이 흥미를 돋운다.
에피소드들은 각각의 맛을 지니고 있는데 이들 에피소드를 식재료 삼아 관객들이 각자의 요리까지 만든다면 색다른 맛을 즐길 수 있을 듯하다. 선문답인듯하면서도 삶의 정곡을 찌르는 대사들이 귓가에 오래도록 맴돈다. "좋은 것 중에 쉬운 게 어딨어?" "사랑 절대로 하지마. 정말로 안 하겠다고 결심하고 버텨 봐. 그래도 뭔가 사랑하고 있을 걸" "누가 성욕한테 이기냐? 너 그런 사람 본 적 있어? 그런 사람 있다고 얘기나 들어 본 적 있어?"
홍 감독은 이 영화를 4명의 스태프와 함께 5,000만원 정도로 지난 겨울 2개월 가량 촬영했다. 16일 개봉, 청소년관람불가.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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