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가 제시한 '공정 사회'에 사회적 논의가 집중되고 있다. 아직까지 정부 스스로 '공정 사회'의 뼈대와 속살을 분명하게 밝히지 못해서인지 다양한 시각의 기대와 주문, 우려가 한꺼번에 쏟아지고 있다.
애초에 고위 공직 후보자들의 도덕적 불투명성에 대한 사회적 비난이 고조되던 시점에 던져졌다는 점에서 공직사회의 도덕적 투명성이 표적인 듯했다. 또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딸 특채 비리를 거치며 절차적 투명성이나 기회 균등이 핵심처럼 여겨졌다. 한편으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이나 친 서민 정책이 강조된 데서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부각됐다.
되살아 난 경제정의의 관념
정치권의 눈길도 각양각색이다. 야당은 정부ㆍ여당의 근본 체질을 들어 껍데기뿐인 대중영합이라고 깎아 내린다. 여당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어제 정기국회 중점법안 40건을 '공정사회 법안'과 '친 서민 법안'으로 분류해 발표하면서 '공정 사회'의 범주를 잔뜩 흐렸다. '공정사회 법안'에는 이른바 '법치'의 강화로부터 소비자 권익 보호, 국립대학 회계 투명성, 방송광고시장의 경쟁 유도 등이 골고루 들어가 있다.
정치권의 이런 혼란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공정 사회'의 제시 이유나 애초의 발상, 정치권의 해석이 아니라 국민적 호응의 진정한 배경과 그에 맞는 사회적 합의의 내용이다. 결국 정부의 실질적 정책목표도 그에 따라 다듬어질 것이고, 아니라면 사회적 압력을 끌어올리면 된다.
다행히 여론은 '공정 사회' 가 경제 정의, 그 가운데서도 상대적인 배분적 정의와 맥이 닿아 있다는 데로 모여들고 있다. 의 저자인 존 롤스가 일찍이 '공정성으로서의 정의'를 제시했듯, 경제정의가 빠진 '공정'은 생각하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 '공정 사회'에 대한 여론의 호응은 'IMF 위기'이후 효율성 구호에 떠밀려 물밑으로 가라앉았던 경제 정의 관념과 요구가 되살아 나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더욱이 이런 현상이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심화한 구체적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일시적 현상이기도 어렵다. 통계청의 소득분배지표에 따르면 한국의 지니 계수(1인 가구 및 농가 포함)는 해마다 높아져 지난해 0.345에 이르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터키와 멕시코를 제외하고는 가장 불평등이 심하다. 안 그래도 평등 지향이 강한 한국 사회가 정의에 목마르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공정 사회'의 1차적 과제는 하위 계층이나 중소기업 등 경제적 약자에 대한 배려의 제도화, 양극화 고착을 막을 기회 보장이 되어 마땅하다. 이는 유사 이래 인류가 끊임없이 실현을 모색한 과제라는 점에서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공정 사회'의 적들을 제약할 수 있다면 크게 보아 실현을 향해 다가서거나 최소한 더는 멀어지지 않게 할 수 있다.
'공정 사회'의 첫 번째 적은 경제 효율성을 이유로 '공정 사회'의 모색 자체에 의문을 표하는 지식인이다. 이들은 과도한 공정성 요구가 기업의 활력과 창의성을 억눌러 배분할 재화의 총량이 줄고, 그 손실은 결국 하위계층에 집중돼 결과적으로 경제 정의와 더욱 멀어진다고 주장한다. 기업의 사회적 존재 이유를 이윤 극대화에 국한하면 맞는 말이지만 기업윤리와 사회적 책임(CSR)이 오히려 비용 절감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외면했다.
지나친 평등 요구 자제해야
물론 경제적 평등 요구가 지나치면 성장 저해로 이어질 수 있어 두 번째 적으로 삼을 만하다. 과제 자체가 워낙 무겁고 어려운 마당에 주문과 요구가 '혁명적 수준'으로 치닫는다면 제도화 실패의 요인이 되고, 사회적 합의도 얻기 어렵다. '같은 것은 같게'에 사로잡혀 '다른 것은 다르게'를 무시한다면 '공정 사회'는 공염불이 되고 만다.
같은 이유로, 또 대중영합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도 정부의 과도한 정책욕구도 금물이다. 작은 정책부터 제도화, 모처럼 싹튼 사회적 분위기 변화를 지켜나가려는 노력이 정부ㆍ여당의 당면과제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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