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시장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세상은 점점 터프해진다. 인문학 따위를 공부할 여유가 없다. 뉴욕타임스 6월 7일자에 게재된 한 칼럼에서 데이비드 브룩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 몇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당연하게도 읽고 쓰는 능력은 모든 성공의 기본이다. 둘째, 감정 언어에 능숙해질 수 있다. 그런 사람은 남들이 그냥 MP3 플레이어를 만들 때 아이팟을 만든다. 셋째, 아날로지(유사성 찾기)의 능력을 길러준다. 그래야 당신의 직장 상사를 나르시스나 솔론 등에 비교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글의 취지에는 동의하지만 인문학도 결국은 성공을 위해서 필요하다는 식의 뉘앙스는 아쉽다. 인문학은 오히려 진정한 성공이 뭔지를 근본적으로 질문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저자가 제시하는 네 번째 이유는 이런 면에서 조금 더 흥미롭다.
그에 따르면 지난 세기 동안 인문학은 인간 행동을 이해하는 다양한 시스템을 구축해왔다. 그것들은 인간의 '내면의 짐승'(inner beast)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그 짐승은 우리를 고양시키거나 추락시킨다. 이 두 얼굴의 짐승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그것에 잡아 먹힐 것이다.
저자는 이 네 번째 이유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문학의 경우는 어떤가. 생각해 보면 작가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일도 바로 그 짐승을 이해하는 것이고, 위대한 문학작품은 그 짐승의 실체를 심오하게 드러낸 작업 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이 그렇고 이 그렇고 이 그렇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인간이라는 태양계에서 발견된 가장 큰 행성들이다. 2006년에 명왕성은 태양계 9번째 행성 자리를 박탈 당했지만 문학에서 이 행성의 숫자는 계속 추가될 것이다.
어떤 이들은 문학의 인간 탐구를 언젠가는 각종 인지과학이 대체할 것이라고 믿는다. 물론 과학이 저 '짐승'의 어떤 경향성을 발견해낸다면 그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과학이 일반적 경향을 밝혀낼 때 문학은 특수한 예외들에 관심을 갖는다. 어떤 조건 하에서 80명이 오른쪽을 선택할 때, 문학은 왼쪽을 선택한 20명의 내면으로 들어가려 할 것이다. 그 20명에게서 또 어떤 경향성을 찾아내려고? 아니다. 그 20명이 모두 제 각각의 이유로 왼쪽을 선택했음을 20개의 이야기로 보여주기 위해서다.
문학은 인간의 선택이 진화론이나 신경학으로 완전히 설명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어떤 사람도 정확히 동일한 상황에 처할 수는 없을 그런 상황을 창조하고, 오로지 그 상황 속에서만 가능할 수 있고 이해될 수 있는 선택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시도, 이것이 문학이다.
밀란 쿤데라는 1985년 예루살렘상 수상 연설에서 "소설은 신학자, 철학자, 과학자가 전날 짜놓은 양탄자를 밤을 새워 풀어헤치는 것"이라고 했다. 이데올로기를 해체하는 유희정신을 옹호하는 말이었지만, 문학의 필요성에 대한 일반론으로도 유용하다.
과학과 문학이 상극이라는 편견을 재확인하려는 것이 아니다. 현대 과학에 무지한 것을 개의치 않는 문학자가 있고, 소설 따위 읽지 않는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과학자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둘은 서로 다른 우물에 있는 개구리일 뿐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국가적 과제라면, 도스토예프스키를 새롭게 읽고 다시 번역할 인재를 길러내는 것도 그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되새기자는 것이다. 수십 명의 도스토예프스키가 덤벼들어도 다 이해할 수 없을 그 짐승이 우리를 잡아먹기 전에.
신형철 문학평론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