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아이들 눈높이를 무시할 수 없는 가족용 애니메이션인데 악당이 주인공이다. 그냥 나쁜 정도가 아니다. '슈퍼'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정의감에 불타는 히어로를 등장시켜도 모자랄 판에 '슈퍼 배드'라니. '야비한 나' 정도로 해석될 원제 'Despicable Me'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상식 밖의 상업영화 아니냐는 의문이 들 수밖에.
결론부터 말하면 '슈퍼 배드'는 흔히 상식이라 일컬어지는 장르의 진부함을 뒤집는 불량식품과도 같은 애니메이션이다. 주인공들의 고약한 행태는 곧잘 웃음을 불러내고, 예상을 벗어난 이야기 전개가 호기심을 유발한다.
주인공 그루는 '누군가 피라미드를 통째로 훔쳐갔다'(이게 말이 되냐고 반문했다간 이 영화 재미없다.)는 긴급뉴스를 듣고 흥분한다. 인류를 구할 슈퍼 히어로로서의 책임감을 절감해서가 아니라 천하 제일의 악당 자리가 흔들릴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그루의 신경을 거스르는 이는 노란색 '이소룡 츄리닝'을 입고 뿔테 안경을 쓴, 악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벡터. 그루는 최고 악당의 오명을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쪼그라트리는 '축소 광선 무기'를 훔쳐 달을 가져오려 한다. 그러나 벡터에게 축소 광선 무기를 뺏기고 이를 되찾기 위해 절치부심한다.
최악의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싸우는 그루와 벡터의 행보가 흥미롭다. 어둡고 낮은 곳에서 고독하게 정의를 구현하는 슈퍼 히어로들과 달리 이들은 백주대낮에 거리낌 없이 악을 행한다. 그루는 집 지하에 첨단 과학시설을 구비해놓고 미니언이라는 정체불명의 귀여운 생명체를 거느린 채 악의 실현에 골몰한다. 벡터도 막상막하다. 킬킬거리며 이유 없이 악행을 즐기는 그에게선 한 움큼의 선함도 찾을 수 없다.
철면피에 첨단 무기로 무장한 악당의 모습은 낯설지 않다. 다만 이 영화엔 '누가 누가 더 나쁜가' 경쟁하는 최악과 차악이 등장할 뿐이다. 그렇게 영웅은커녕 착해 보이는 어른 한 명 없는데 기이하게 인류는 위기를 벗어나고, 영화는 해피 엔딩으로 끝을 맺는다. 벡터와 경쟁하던 그루가 고아원 삼남매에게서 부성애를 느끼면서 영화는 반전의 물살을 탄다. 물론 설득력이 약하다. 뼈 속까지 악인일 듯한 그루가 고아들 때문에 심경 변화를 일으키는 과정은 요령부득이다.
상식 밖의 소재 덕분일까. 흥행 성적도 상식을 뒤집었다. 영화흥행 조사기관 박스오피스 모조에 따르면 12일까지 미국 시장에서 2억4,337만달러를 벌어들이며 애니메이션 강자로 여겨지던 '슈렉 포에버'와 '드래곤 길들이기'의 성과를 넘어섰다. 엄지를 선뜻 올릴만한 영화는 아니지만 뜻밖의 재미를 선사한다. 감독 크리스 레노드, 피에르 코팽. 16일 개봉, 전체관람가.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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