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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52> 이옥(李沃)의 배사론(背師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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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52> 이옥(李沃)의 배사론(背師論)

입력
2010.09.1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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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은 숙종조의 서남당쟁에서 남인의 맹장으로 활약한 사람이다. 그의 가문은 명문인 연안이씨이다. 아버지는 좌참찬을 지낸 이관징(李觀徵)이다. 이옥은 1674년 (현종 15) 갑인예송에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집권하자 남인 언관으로서 기해예송(己亥禮訟) 때 송시열의 오례(誤禮)를 공격해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에 서인들은 이옥을 신랄하게 공격했다. 그리하여 1680년(숙종 6)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이옥은 선천, 정주, 가산, 안령, 회령, 갑산, 곡성 등 극변으로 12년간이나 귀양살이를 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재집권하자 석방되어 서인의 맹주인 송시열을 죽였다. 서인은 분기탱중했다. 서인은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재집권했다. 이로서 남인세력은 재기불능이 되었다. 이옥은 실각했을 뿐아니라 패륜아로 몰렸다. 서인이 편찬한 에는 이옥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이옥은 이관징의 아들이다. 쥐의 낯짝에 여우의 얼굴이어서 암계(暗計)와 간사함을 헤아릴 수 없었으니, 참으로 하늘이 낸 소인이다. 글재주가 조금은 있어 젊어서 과거에 올랐다. 일찍이 송시열의 문하에 출입하며 스승으로 섬기면서 매양 송시열을 정자·주자의 도학(道學)과 반고·사마천의 문장이라 일컬었으며, 서신의 왕복도 매우 많았다. 일찍이 4폭의 종이에 행신(行身)하고 종사(從仕)하는 요어(要語)를 써 받기를 청했는데, 그 말이 매우 아첨에 가까웠다. 그는 송시열에게 받은 글을 도장(圖章)에 새기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는 선생이 가르친 교훈이라 이 몸이 다하도록 차고 다니려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에 미쳐 이옥이 참새가 설치듯 일어나 송시열을 앞장서서 공격하고 배척하기에 온 힘을 다했다. (중략) 이에 이르러 조세환(趙世煥)이 시를 짓기를 '동방 앞뒤에 이옥이 나니,(前後東方生李沃) 사문(斯文)의 액운이라 하늘에 어찌 하리(斯文厄會奈何天)'라고 했다. 그러나 이옥의 무리들이 이를 미워해 마침내는 조세환을 어떤 일로 죄를 주고야 말았다"( 권 4, 숙종 1년 윤 5월 12일 '기해')

이옥이 스승인 송시열을 배반했다는 배사론을 제기한 것이다. 권력투쟁에서 패배하면 패배자는 결국 패륜아로 몰리게 마련이다. 이옥도 마찬가지였다. 이옥은 경신환국 이후 12년간이나 여러 곳으로 유배지를 전전했다. 그러다가 모처럼 재기의 기회가 왔으니 적당의 핵심인 송시열을 죽였던 것이다. 약체인 남인은 조급했던 것이다. 이옥은 송시열을 그저 평상한 스승으로 섬겼을 뿐이라고 했다.

당이 다르고 집권의 기회는 쉽게 오는 것이 아니니 남인의 첨병으로서 적당의 괴수를 공격한 것일 뿐이었다. 당쟁이란 본래 그런 것이 아닌가? 그러니 당쟁에 관한 기록을 읽을 때는 일정한 과장이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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