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험실 동거로 세계 빅3 금속가공유 낳았다
“대기업이 협력업체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건 임시방편입니다. 대기업과 협력업체가 동등한 파트너로서 머리를 맞대고 기술개발에 전력투구, 세계시장에서 인정 받는 품질과 기술력을 갖춰야 합니다.”
세계 금속가공유 제품 시장에서 당당히 ‘빅 3’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범우연합의 김명원(70) 회장은 10일 대기업과 협력업체의 바람직한 상생 협력을 이같이 설명했다.
1973년 문을 연 범우는 1,500가지가 넘는 금속가공유 제품을 생산, 국내 주요 대기업과 14개 국에 수출하고 있다. 지난해 매출만 2,500억원. 중국, 인도, 터키의 6개 회사로부터 해 마다 500만~600만 달러의 로열티(기술이전료)도 받고 있다.
범우로부터 냉각 압연유(rolling oil), 코일 코팅제 등을 공급 받는 포스코 관계자는 “포스코가 두께 0.2mm의 냉연강판을 분 당 2,150m라는 놀라운 속도로 만들 수 있는 것은 냉각 압연유가 마찰을 줄여주기 때문”이라며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과 생산성을 유지하는 데는 범우가 지원군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대ㆍ기아차, 삼성전자, LG전자도 자동차와 전기ㆍ전자 제품이 녹 스는 것을 막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방청유(anti- rust oil)의 90%를 범우 제품으로 쓰고 있다.
김 회장은 특히 “세계 시장에서 기술력을 인정 받는 데는 포스코의 뒷받침이 컸다”며 “회사 설립 초기부터 우리 기술력을 믿고 일본 제품 대신 우리 제품을 선택했고, 이후 30년 넘게 안정적으로 거래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압연유 개발에 필요한 400억원이 넘는 고가의 실험 설비도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제품 개발 초기부터 포스코 및 포스텍 연구진과 함께 연구하는 등 인적, 물적 지원이 기술력 향상에 큰 힘이 됐다”고 덧붙였다.
포스코는 협력업체와 공동 기술개발을 포함한 각종 개선 활동을 진행하고 여기서 얻어지는 성과를 공유하는 ‘베너핏 셰어링(Benefit Sharingㆍ성과 공유)’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범우와는 2004년 ‘압연윤활성 최적화’를 시작으로 10개의 과제를 끝냈다. 이 중 7건은 연간 평균 13억원, 나머지 3건은 7억원의 경제적 효과를 얻고 있다고 범우 관계자는 설명했다.
범우는 포스코와의 협력 관계를 통해 친환경 나노기술을 적용한 절삭유, 태양전지, 풍력발전기 용 수용성 가공유, 열처리유 등 미래형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김 회장은 “대기업은 협력업체에 무조건 납품 가격을 낮추라고만 요구해서는 안 된다”며 “세계 시장을 대상으로 품질과 가격을 조사해 국제 표준을 만들고 이를 통해 협력 업체에 품질과 가격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중소기업 역시 국내 시장에만 안주하지 말고 세계 시장에서 인정 받을 수 있는 제품을 만들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포스코처럼 협력업체와 손잡고 기술 개발에 힘 쏟는 대기업들이 늘고 있다. 품질이 기업 경쟁력의 핵심으로 떠오르는 상황에서 부품을 제공하는 협력업체와 한 몸처럼 움직여 기술력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제품 설계 단계부터 협력업체 직원들을 초청, 공동으로 연구개발(R&D)을 진행하는 ‘게스트 엔지니어링’제도를 운영 중이다. 협력업체 모토닉은 세계 최초로 친환경 하이브리드 LPI(LPG와 전기모터가 동력원) 양산에 성공, 최소 1,000억원 가까운 이득을 얻었다.
한화케미칼은 세계 최초로 개발한 고품질 EVA(필름 원료의 하나)로, 합성수지 필름(라미네이팅)을 제조하는 GMP와 함께 EVA를 라미네이팅 코팅 필름에 적용, 상업화에 성공했다. GMP는 한화케미칼의 지원 속에 라미네이팅 기계와 필름 분야에서 세계 시장 점유율 1위 기업으로 컸다. 특히 GMP의 40여개 특허 중 10여개는 한화케미칼과 공동 개발을 통해 얻었다.
최근 상생협력 분위기를 타고 다양한 아이디어도 봇물을 이루고 있다. 삼성전자는 반도체와 액정패널(LCD) 설비 국산화를 위해 협력업체들이 초정밀 계측장비ㆍ핵심 원자재를 맘껏 쓰도록 하고 선진기술 교류회를 통해 발굴한 과제 개발을 적극 후원하기로 했다. 숙박이 가능한 ‘공동 기술개발 지원센터’를 지어 삼성전자와 협력사 관계자가 좋은 환경에서 공동 개발을 진행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LG그룹은 태양전지, 전지자동차용 배터리, 스마트그리드 등 그린 신사업 분야에서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2011년부터 5년 동안 1,000억 원 규모로 우수 중소기업에 R&D 용역을 줄 계획이다.
한국전력은 전력분야 기술전문 인력 20여명을 활용해 협력업체의 기술 개발을 돕는 ‘전력기술지원 가동반’을 운영한다.
재계 관계자는 “미래 시장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필수적인 기술 독립, 시설ㆍ장비 국산화 등은 아무리 뛰어난 대기업이라도 혼자 해결하기는 어렵다”며 “협력 업체와 공동 운명체로 이를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박상준기자 buttonp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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