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원(金錦園ㆍ1817-?)은 기행문이자 자서(自敍)이기도 한 《호동서낙기(湖東西洛記)》라는 작품을 남긴 조선 말기의 여성 문인이다. 여성의 국문 기행문으로 의령(宜寧) 남씨(南氏)의《관북유람일기(關北遊覽日記)》와도 비길 만한 기행문이면서, 평생 여행의 내력을 정리하여 자서전이 되게 한 곳에 묘미가 있는 글이다.
동인 박죽서(朴竹西)가 발문에 썼듯이, “시문에 능한 이가 예로부터 강산(江山)의 도움이 많다”고 한 좋은 보기 글이라고 할 만하다. 시골의 한미(寒微)한 가문에 태어난 14세 소녀가 고향인 원주(原州)에서 제천을 거쳐 금강산(金剛山)과 한양을 여행하고, 결혼 뒤에는 남편을 따라 북쪽변방을 두루 여행했다.
“천하 강산은 크고, 고금 세월은 오래구나. 인간사 가고 옴은 하나도 같지 않고, 생물은 형형색색 또한 만 가지로 같지 않다. 산은 본래 하나이나 끝내 만 가지로 흩어져 수많은 모습의 서로 다른 산이 있고, 물은 본래 만 줄기이나 끝내 하나로 모여 일천 물결 일만 굽이의 다름이 있다. …남자와 여자의 다름도… 만물마다 다르다.
비록 그러나 눈으로 산하의 큼을 보지 못하고 마음으로 사물의 중다함을 겪지 못 한다면 통변하여 그 이치에 도달할 수 없어, 국량이 협소해지고 식견이 통달하지 못한다. 따라서 인자(仁者)는 산을 좋아하고 지자(知者)는 물을 좋아하며, 남자가 사방에 노니는 뜻을 귀중히 여기는 이유이다. 여자 같으면 발이 규문 밖을 나가지 못하고… 규중에 깊이 살아 그 총명과 식견을 넓힐 수가 없어 끝내 사라져 버리게 되는 것이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이혜순, 정하영 역편; 《한국고전여성문학의 세계》산문편)
경인년(庚寅年ㆍ1830) 춘삼월 열네 살 난 시골 소녀는 남장(男裝)을 하고 수레를 타고 의림지를 찾아서는, 풍류를 곁들인 연못 구경과 민물 생선회를 맛보며, 지방의 명물인 순채를 데쳐서 오미자 간을 쳐서 처음 먹어보는 호사를 더했다. 그리고 동해안으로 내금강과 외금강을 두루 구경하고, 관동팔경(關東八景)과 설악산을 종주하여 한양(漢陽)에 이르렀다.
시골 소녀 김금원의 금강산 여행은 천하 명기 황진이(黃眞伊)를 빼면, 제주 여걸 김만덕(金萬德)의 금강산 유람과 멀지 않은 동시대였다. 그리고 29세에는 의주(義州) 부윤으로 부임하는 시랑(侍郞) 김덕희(金德熙)의 소실이 되어, 행차보다 먼저 길을 떠나 의주에 이르렀다. 2년간 이곳 용만(龍灣)에 살며, 통군정(統軍亭)에 오르고, 압록강과 구련성(九連城)을 구경하며 국경 도시를 두루 여행한 그미(그녀)의 이 평생의 여행의 내력이 자서전을 이루었다.
지금은 바야흐로 ‘길’[걷기]의 시대, 길 걷는 사람들의 주류는 단연 여성. 예로부터 아들을 낳으면 뽕나무 활에 쑥대화살로 천지사방을 쏘아, 웅비(雄飛)하기를 비는 풍습이 있었다. 지금은 산천유람의 7~8할은 여성인 시대, 일찍이 김금원은 황진이 김만덕을 이어, 이런 여성 길 걷기 시대의 선봉이 될 꿈이나 꾸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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