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턴 와일더 지음ㆍ김영선 옮김
샘터 발행ㆍ256쪽ㆍ1만3,000원
미국 소설가 손턴 와일더(1897~1975ㆍ사진)의 대표작으로, 20세기 영미소설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다. 와일더는 20세 때인 1927년 발표한 이 장편소설로 이듬해 퓰리처상을 받았다. 국내에도 번역된 1938년작 희곡 와 1943년작 희곡 로도 각각 퓰리처상을 받았다. 그는 퓰리처상을 세 번이나 받은 유일한 작가다.
이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다. “1714년 7월 20일 금요일 정오, 페루에서 가장 멋진 다리가 무너져 여행객 다섯 명이 다리 아래 깊은 골짜기로 추락했다.” 페루 리마에서 선교를 하던 주니퍼 수사는 마침 이 사고 장면을 목격하고 깊은 의문을 품는다. 왜 하필 저 다섯 사람에게 불운이 닥쳤을까. 생사를 가르는 것은 ‘우연’인가, 아니면 ‘정해진 섭리’인가. 젊은 신앙인의 열정으로 그는 희생자들의 삶을 추적한다. 그러다가 신의 섭리를 의심했다는 죄목으로 종교 재판에 회부돼 화형을 당한다.
주니퍼 수사가 남긴, 희생자들의 생애를 기록한 네 편의 이야기가 소설의 몸통을 이룬다. 인물과 사건이 정교하게 맞물리는 이들 이야기는 제각기 다른 주제를 드러낸다. ‘몬테마요르 후작 부인’ 편은 사랑과 집착에 관한 서사다. 어머니의 과도한 애정과 간섭에 견디다 못해 도망치듯 스페인으로 시집간 외동딸에게 어머니는 틈만 나면 편지를 보낸다. 편지엔 자신이 결코 딸에게 사랑받지 못하리라는 쓰린 예감과 그걸 확인하고 싶지 않은 심약함이 함께 들어 있다. 하지만 그녀는 몸종 페피타와의 대화를 계기로 자신이 모성애라는 명분 뒤에 숨어 “인생에서도 사랑에서도 한 번도 용기를 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새 인생을 살겠다는 그녀의 뒤늦은 결심은 허망하게도 다리와 함께 무너진다.
한때 리마를 주름잡던 퇴물 여배우 카밀라와, 길거리 소녀였던 그녀를 발굴해 평생 뒷바라지하는 피오 아저씨의 일화는 예술가소설이자 색다른 사랑 이야기로 읽힌다. 피오에게 늘상 예술혼이 담긴 연기를 요구받던 카밀라는 인기를 얻자 점점 연극을 등한시한다. 페루 최고 권력자인 총독을 비롯해 뭇 남자들과 연애 행각을 벌이는 그녀의 타락은 피오에게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에 다름아니다. 그런 그녀를, 불어나는 빚과 추해지는 외모로 몰락해가는 그녀를 끝까지 돌보는 피오의 마음에서는 사제의 정을 넘어선 깊은 연정이 느껴진다. 그녀와 총독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거둬 떠나는 길에 맞은 피오의 최후는 애틋한 정사(情死)처럼 여겨진다.
스승과 아들을 잃은 카밀라, 후작 부인의 딸 등이 리마의 정신적 지주인 마리아 수녀원장을 찾아가 죽은 자들에 대한 사랑을 통절히 고백하는 장면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우연 혹은 섭리라는 설명으로는 위로되지 않는 이들의 슬픔을 달래며 수녀원장의 마음은 따뜻해진다. 산길을 잇는 다리는 끊어졌어도 사람의 진심을 잇는 다리는 언제까지나 건재할 것임을 확인했기에. “곧 우리는 죽게 될 것이고, 그 다섯 사람에 대한 모든 기억은 지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 사랑이면 충분하다.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땅이 있고 죽은 사람들을 위한 땅이 있으며, 그 둘을 연결하는 다리가 바로 사랑이다. 유일한 생존자이자 유일한 의미인 사랑!”(212쪽)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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