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인욱 지음
돌베개 발행ㆍ287쪽ㆍ1만7,000원
“주림 참고 추위 견디고 가난 타령 아예 말며, 손에 돈을 쥐지 말고, 쌀값도 묻지 말고, 날 더워도 발 안 벗고, 맨상투로 밥상 받지 말고….”
조선 후기 실학자 연암 박지원의 ‘양반전’에 나오는 구절이다. 양반 노릇, 참 어려웠겠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소설의 주인공은 돈 천 냥으로 양반을 사려다가 진상을 깨닫고는 양반 되기를 거부한다.
조선이 양반의 나라였다는 건 다들 안다. 하지만 양반의 삶이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는 잘 모른다. 은 탄생부터 죽음까지 조선 양반의 일대기를 옛그림과 옛글로 더듬어본 책이다. 김홍도, 김준근 등 조선 후기 화가들의 풍속화와 작자 미상의 민화, 옛사람들의 문집 등에서 찾아낸 조각들을 짜맞춰 구성했다.
사람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기념이 될 만한 경사스런 일들을 골라 그린 ‘평생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첫 장면은 돌잔치다. 이어서 아이가 장성해서 혼인을 하고, 과거에 급제해서 벼슬길에 나아가고, 발령을 받아 임지로 떠나고,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재상이 되고,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고, 육십 갑년을 해로한 부부가 회혼례를 올리는 장면까지가 평생도의 내용이다.
양반집 혼사의 전 과정을 소개한 장의 끝에는 조선 후기 문인 이옥의 시가 나온다. ‘4경에 일어나 머리 빗고/ 5경에 시부모께 문안한다네/ 장차 친정에 돌아가선/ 먹지 않고 한낮까지 잠만 자리.’ 양반집 새색시의 시집살이도 어지간히 고됐나 보다.
이 책에는 과거 급제와 벼슬살이 이야기가 많다. 양반은 입신양명을 가문의 영광이자 인생 최대의 과제로 여겼기 때문이다. 과거 시험의 부정을 막기 위한 여러 묘책들과, 그래도 끊이지 않았던 온갖 술수들, 나이 여든이 넘어서도 과거 급제에 매달리는 안쓰러운 노인, 급제자가 사흘간 거리를 돌며 뽐내던 삼일유가의 뜨르르한 행렬과 풍악소리, 관직을 받은 신참에게 선배들이 골탕을 먹이던 신고식 풍경 등을 세밀하게 전한다.
과거시험은 소과와 대과가 있었다. 생원과 진사를 뽑는 소과는 오늘날 국립대학에 해당하는 성균관 입학 자격 시험이고, 대과는 관직을 받을 수 있는 임용 고시다. 소과 합격자의 평균 연령은 34.56세, 대과는 어찌나 어려운지 급제자 평균 연령이 37~38세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요즘 방영되는 TV 사극 ‘성균관 스캔들’은 이팔청춘 유생들의 로맨스이지만, 성균관 학생들의 실제 연령은 30대 중반이 대부분이었다니 사실과는 다르다. 그 나이가 되도록 과거 시험 공부에만 코를 박은 가장 때문에 양반집 부인과 자식들 고생이 얼마나 심했을까 생각하면 한심하기도 하다. 수험생 양반의 스트레스 또한 대단했을 것이다.
이 책은 양반의 일생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게 장점이다. 그러나 사람 냄새와 숨결이 약한 것은 아쉽다. 객관적인 사실들을 서술하는 데 주력하다 보니, 양반의 희로애락을 살펴 교감하는 것은 대부분 생략됐다. 빈 자리는 독자가 상상력을 발휘해 메꾸는 수밖에 없다. 이 책을 토대로 좀 더 생생한 양반전이 나왔으면 좋겠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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