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현실의 거울이다. 이명박 정부가 국정 후반기 의제로 세운 '공정한 사회' 역시 우리사회의 불공정성이 더 이상 감당키 힘든 임계점에 도달해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청문회에서 드러난 고위공직 후보들의 처신이나 현직장관 딸 특채 건은 상징적 사례다.
공정성(fairness)의 개념은 워낙 포괄적이어서, 확장하면 철학적 논쟁까지도 필요하겠지만 정부가 말하는 공정성은 상식 수준으로 이해하면 될 터이다. 엊그제도 청와대에서 구구한 설명을 달았지만 결국 한마디로 요약하면 '기회의 균등, 특권의 배제'다.
공정사회 실현과정의 걸림돌
온통 범람하는 공정성 담론에 뻔한 한마디를 더 얹을 생각은 없다. 다만, 이명박 정부가 공정사회 목표의 진정성을 인정 받으려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전제조건을 말하고자 함이다. 바로 친형 이상득 의원 문제다. 실체가 있든 없든 이 족쇄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하면 공정성 구호는 한낱 허망한 수사(修辭)로 곧장 전락할 것이 명약관화하기 때문이다.
사실 MB는 이런저런 족쇄에 묶일 이유가 없는 드문 대통령이다. 그는 알다시피 빈한한 환경에서 태어나 오직 혼자 힘으로 삶을 개척해온 인물이다. 고된 성장기를 거쳐 기업인 정치인으로 입신하는 과정에서 기득권층 누구에게도 일방적 신세를 진 일이 없다. 노력과 실적이 인정 받았을 뿐이다.
특별히 출신지역의 덕을 본 흔적도 없다. MB가 대선에 나섰을 때 아무도 그를 '정통' TK의 범주에 놓고 보지 않았다. 오히려 당내 경선에선 지역배경이 겹치는 박근혜 후보 측의 지역색이 더 짙어 보였다. 앞서 종로지역구 국회의원과 서울시장 등 이른바 '전국구' 경력도 그의 지역색을 탈색시키는데 도움이 됐을 것이다.
비교하자면 전임 YS, DJ는 솔직히 여러 족쇄에서 자유롭지 못한 대통령들이었다. 수십 년 목숨 건 투쟁을 벌이면서 PK, 호남의 지역적 기반이 그들 정치적 생존의 결정적 버팀목이 돼주었음은 부인키 어렵다. 그들에겐 또 그 긴 고난의 세월을 함께 견디어준 측근동지들이 있었다. 인간적 정으로도 차마 매몰차게 대하기 어려웠다.
심지어 MB만큼이나 어렵게 성장한 노무현 전 대통령조차 오랫동안 외로운 이념을 공유하며 서로 의지하던 그룹이 있었다. MB에겐 이마저도 없다. 측근이라고 해봐야 그가 유력한 대권주자로 떠오르면서 내심 한 자리씩 염두에 두고 황급히 모여들어 고작 1~2년 정도 거든 이들이 대부분이다. MB는 부담을 가질 만한 정치적, 개인적 부채가 없는 대통령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투명, 공정, 탕평의 정치를 펴기에 다시 없는 조건을 가진 그가 뜻밖에도 집권 초 인사에서부터 기대를 허물었다. 이후로도 정치권, 행정부, 국영기업, 은행이나 민간기업 인사 때마다 특정인, 특정 그룹의 개입 소문 등이 끊이지 않았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그 과정에서 MB 또한 전임들처럼 빚 갚기에 신경 쓰는 모양새로 비쳐졌다.
물론 언제나 그런 소문의 중심에 있던 이는 MB가 아니라 이상득 의원을 비롯한 일단의 그룹이었다. 귀를 가진 이라면 다들 들었어도 사실 명확하게 확인된 건 아직 없으니 당사자들로서는 매우 억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든 이제 이명박 정부가 야심 차게 공정사회를 후반기 국정아젠다로 내건 이상 MB든, 이 의원이든 더 이상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어쨌든 국민은 MB만 선택했을 뿐이다.
대국적 차원의 희생 감당해야
목표가 근사할수록 실행은 더 어려운 법이다. 그래서 걱정이 크다. 과거 전두환 정권도 유사한 국정목표를 내걸었지만 실천이 수반되지 않은 그 '정의사회'라는 것이 두고두고 얼마나 조롱을 받았던가. '공정한 사회'도 까딱하면 전철을 밟을 수 있는 것이다.
마침 이번 태풍 곤파스에서도 교훈을 얻었다. 바람 잘 타기 마련인 무성한 나무를 큰 바람에서 지키려면 충분히 가지치기를 해둬야 한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 뻗어난 게 가지의 잘못은 아니라 해도. 아직 늦지 않았다.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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