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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관계 해빙 무드/ 쌀쌀한 남북관계 푸는데 '쌀'이 한몫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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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관계 해빙 무드/ 쌀쌀한 남북관계 푸는데 '쌀'이 한몫 했다

입력
2010.09.07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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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주도의 대북 지원은 과거에도 경색된 남북관계를 푸는 핵심 열쇠였다.

가장 확실한 예는 2006년 북한이 대포동 미사일을 발사했을 당시다. 유엔의 대북 제재 결의가 진행되는 와중에 정부도 북한에 대한 쌀과 비료 지원 논의를 중단해 남북관계는 급속도로 얼어 붙었다. 그러나 정부는 7월 북한에 큰 수해가 나자 인도적 차원에서 대한적십자사와 민간을 통해 각종 복구용 자재와 장비, 10만톤의 쌀을 북측에 지원했다.

북한은 곧 이어 1차 핵실험을 감행했지만 이듬해 북미관계 진전과 함께 남북 장관급회담이 재개됐다. 남북간 신뢰에 기반한 대북 지원은 그 해 10월 2차 남북 정상회담으로 결실을 맺었다.

특히 쌀은 남북관계 개선의 촉진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2000년 1차 남북 정상회담의 산물로 대북 식량차관 지원이 정례화되면서 2007년까지 매년 30만~50만톤의 쌀이 북한에 보내졌다. 대가는 풍성했다. 10여 차례에 걸쳐 1만6,000여명의 남북 이산가족들이 혈육을 품에 안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역으로 북한이 우리에게 도움을 준 적도 있었다. 1984년 9월 남측에서 홍수 피해로 인해 1,000억원이 넘는 재산 피해가 발생하자 북한 조선적십자회는 쌀 7,200톤, 시멘트 10만톤, 의약품 등을 지원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1년 전 북한이 저지른 미얀마 폭탄 테러 사건에도 불구하고 북측의 제안을 전격 수용했다. 북한의 의도를 둘러싸고 논란이 분분했지만 북측의 대남 지원은 그 해 남북간 최초의 경제회담, 1985년 이산가족 고향 방문단 교환사업으로 이어지는 성과를 냈다.

김이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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