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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 삶의 질 바꾼다/ <중> 장애인 돕는 소통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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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 삶의 질 바꾼다/ <중> 장애인 돕는 소통기술

입력
2010.09.07 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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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이가 곁에 있지만 고백할 수도, 입맞출 수도, 안을 수도 없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하지만 다 보이고 다 생각난다. 의식만은 무섭도록 또렷하다. 이 심정을 누가 헤아릴까.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병. 지난해 개봉한 영화 ‘내 사랑 내 곁에’에서 주인공 백종우(김명민 분)가 앓은 루게릭병이다. 루게릭병 환자를 포함한 많은 중증장애인에게 우리 사회는 아직 면목이 없다. 그들에게 삶의 질을 이야기할 희망을 줄 수 있는 건 바로 과학기술이다.

최후의 보루, 뇌와 얼굴

중증장애인도 뇌와 얼굴은 마지막까지 정상적으로 활동한다. 뇌와 얼굴에선 뇌파를 비롯해 뇌혈류도 안전도 근전도 같은 다양한 생체신호가 나온다. 안전도는 눈, 근전도는 얼굴 근육이 움직일 때 발생하는 전기신호다. 보통 사람처럼 말이나 동작으로 의사를 표현하기 어려운 장애인의 생체신호를 정확히 감지한다면 어느 정도 의사소통도 가능해질 것으로 과학자들은 예상한다.

뇌파나 근전도 같은 몇몇 생체신호는 지금도 의료계에서 병을 진단하는데 쓰인다. 하지만 대부분 대규모 측정장비가 필요한 데다 분석도 어렵고 오래 걸린다. 장애인의 의사소통용으로 쓰려면 휴대할 수 있고 조작도 간단한 장치로 바꿔야 한다.

박광석 서울대 산학협력단 생체계측신기술연구센터 교수팀은 전극이 달린 특수모자를 쓰기만 하면 뇌파나 뇌혈류도가 측정되는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 뇌파는 뇌신경이 활동할 때 생기는 전기가 모여 만들어진 신호다. 뇌 속 혈관이 활동하면 부위에 따라 혈류가 증가하거나 감소하는데, 이를 측정한 건 뇌혈류도다.

생체신호는 보통 몸이 직접 움직이는 것보다 30∼70밀리초(1밀리초=1000분의 1초) 전에 발생한다. 박 교수팀의 목표는 특수모자가 감지한 생체신호를 종합해 장애인의 의사나 의도를 빨리 파악해내는 것이다. 그는 “생체신호 측정 기술은 외국에서도 상용화 사례가 적은 초기 단계”라며 “원천기술과 특허를 선점할 수 있는 분야”라고 밝혔다. 박 교수는 뇌 신호를 감지하는 특수모자에 컴퓨터나 휠체어 같은 기계를 연결해 장애인이 원하는 대로 조작할 수 있게 만들 생각이다. 실제로 일본이화학연구소는 자동차기업 도요타와 함께 뇌파를 인지해 전동휠체어를 앞과 오른쪽, 왼쪽의 세 방향으로 움직이는 데까지 성공했다.

강지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나노바이오센터 책임연구원팀은 기계 대신 아예 손을 뇌 신호와 연결하기로 했다. 척수신경장애인이나 중풍, 전신마비를 앓고 나면 회복돼도 신체 말단 부위인 손을 움직이는데 유독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강 연구원팀은 뇌 생체신호를 읽어 뇌가 생각한 자극을 말초신경에 직접 가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간단한 동작 정도는 생각대로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강 연구원은 “쥐 대퇴부에 있는 신경다발들을 정확히 자극하는 실험을 진행 중”이라며 “신경섬유 하나의 두께가 1mm도 안돼 컨트롤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신경다발 하나에는 신경섬유가 1,000∼1만개 들어 있다.

언어 장애 있어도 전화 통화

2007년 12월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등록된 장애인은 210만명. 총 인구의 4.27%다. 1997년(42만5,000명)보다 약 5배 늘었다. 전체 고령인구의 87% 이상이 만성퇴행성질환으로 신체적 장애를 겪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장애인의 경제·사회적 참여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기술개발은 미흡하다.

장애인을 위한 기술은 특히 난이도가 높다고 과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상용화까지도 그만큼 오래 걸린다. 당장 몇 년 안에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놓아야 하는 지금까지의 국내 과학계 분위기에서는 이런 기술이 꾸준한 관심을 받기 쉽지 않았다. 박광석 교수는 “이번 공공복지안전연구사업 덕분에 그 동안 지원이 부족했던 분야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고 반겼다.

이참에 박 교수는 자신이 이끄는 연구단에 이비인후과 전문가도 합류시켰다. 언청이라고 불리는 구순구개열 환자를 위한 음성복원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서다. 구순구개열 환자는 수술이나 언어치료를 수 차례 거쳐도 언어장애가 완치되지 않는 사례가 많다.

휴대전화에 대고 이름을 말하면 그 사람에게 전화가 걸리는 식의 정상인 음성인식 기술은 국내외에서 이미 많은 연구가 이뤄졌다. 하지만 음성장애가 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인식하는 기술은 거의 전무한 상황이다. 박 교수는 “장애가 있는 발음을 인식한 뒤 인공지능 처리과정을 거쳐 정상인에 가까운 음성으로 복원시키는 방법을 고안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망막세포 대신하는 전극

보통 세포와 달리 눈의 망막세포는 한번 손상되면 재생되지 않는다. 눈에 들어온 빛을 감지해 전기신호로 바꿔 시신경에 전달해주는 망막세포가 제 기능을 못하면 시력에 이상이 생긴다. 한번 시력을 잃으면 회복도 어렵다. 시각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유전자치료나 줄기세포 망막이식술 등 다양한 연구가 진행 중이나 아직 뚜렷한 성과는 나오지 않고 있다.

정상돈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신경계인터페이스연구팀 책임연구원은 망막세포를 대체할 전극을 개발한다. 장애인이 작은 카메라가 설치된 안경을 쓰면 카메라 렌즈에 나타나는 화면이 영상신호로 바뀌어 망막에 삽입된 전극으로 전달된다. 전극은 영상신호 정보를 시신경으로 보낸다. 이를 뇌가 인식하면 마치 직접 보는 것처럼 눈앞의 장면을 떠올릴 수 있다. 인공시각 장치다.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 도헤니시력연구소가 민간기업 세컨드사이트와 함께 이와 비슷한 장치를 개발해 2006년 말부터 지금까지 30여 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임상시험을 하고 있다. 일부 환자는 접시와 컵, 창문 같은 사물과 몇몇 알파벳을 구별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 연구원은 그러나 “외국 기술도 대부분 아직 영상이 흑백으로 흐릿하게 보이는 정도”라며 “해상도와 이식안정도를 얼마나 향상시키느냐가 상용화의 관건”이라고 말했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 "뇌-기계 인터페이스 기술, 장애인의 삶 획기적으로 개선"

2008년 영국 과학학술지 ‘네이처’에 흥미로운 연구결과가 실렸다. 원숭이의 팔을 움직이지 못하게 잡아두고 어깨에 붙인 로봇팔과 대뇌의 운동신경 영역을 직접 연결했다. 원숭이가 팔을 들어 먹이를 집으려고 할 때 발생하는 뇌의 전기신호를 감지해 팔 대신 로봇팔을 움직여 먹이를 집게 했다. 이른바 ‘뇌-기계 인터페이스(BMI)’ 기술이 원숭이에서 실현된 것이다.

초기엔 주로 산업용이나 게임용 기술로 관심을 모은 BMI는 이제 몸이 자유롭지 못한 장애인과의 의사소통 수단으로 주목 받고 있다. 물론 아직 갈 길은 멀다.

“BMI로 의사소통을 하려면 우선 뇌나 신경의 전기신호를 지속적으로 잡아내고 동시에 기록도 해야 해요. 단순히 로봇팔 한번 움직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죠.”

BMI를 기반으로 장애인의 동작을 돕는 기술을 개발 중인 강지윤(43ㆍ사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나노바이오센터 책임연구원의 설명이다. 차원이 다른 기술인 만큼 개발하는 동안 고려할 요소도 많다.

“예를 들어 생체신호를 감지하는 전극을 우리 몸에 이식하면 인체는 이물질로 여겨 면역반응을 일으켜요.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전기신호를 전달하는 세포와 전극 사이 거리가 멀어지죠. 보통 6개월 정도 지나면 전기신호 10개 중 절반은 사라집니다.”

이 때문에 전기신호에 민감하면서도 면역반응은 최소화하는 특별한 전극이 필요하다. 공학과 의학이 융합해야 실현 가능한 기술이다. 강 연구원은 원래 기계공학자다. 지금은 장애인을 위한 행동보조기계를 만드는 의공학자로 변신했다. 그리고 의공학에 이제 뇌과학을 융합시킨다는 포부다.

“뇌과학 하면 범위가 매우 넓죠. 뇌 연구를 생명공학과 연결시켜 약을 개발하는 연구는 이미 많이 진행되고 있어요. 우리는 뇌과학을 응용해 장애인을 위한 의료기기를 만드는 거죠. 삶의 질이 사회 이슈로 대두되면서 뇌과학과 기계공학이 만난 의공학의 필요성은 더욱 커질 겁니다.”

임소형기자

■ R&D투자 중 경제개발 예산 대비 공공 복지 예산 비율…

우리나라 공공·복지·안전 분야의 연구개발(R&D) 투자 규모는 아직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의 평균에도 미치지 못한다. 최근 OECD가 정부 R&D 지출에서 경제개발과 산업경쟁력 강화를 위해 투자한 예산 대비 공공·복지 투자 예산 비율을 비교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미국 509.2%, 한국 31.3%로 크게 차이 났다.

경제개발 투자액이 똑같이 100만원이라고 치면 미국은 공공·복지에 500만원을, 한국은 30만원을 투자한다는 애기다. OECD 평균 117.5%에도 한참 못 미치는 수치다. 우리 정부의 연구개발 투자가 지금까지 산업혁신 중심으로 이뤄져 온데 비해 미국은 국립보건원(NIH) 등을 중심으로 환경과 보건 분야 연구를 지속적으로 지원해왔기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은 지난 2월 내놓은 ‘소외계층 삶의 질 향상을 위한 과학기술’ 보고서를 통해 “수요자인 국민보다는 정부와 기업 등 공급자를 중심으로 연구개발이 추진돼 성과의 실용화나 확산이 지연되고 있다”고 밝혔다.

최근 OECD 조사 결과 우리나라 국민의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과 이해도가 47%로 낮게 나타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고 보고서는 해석했다. 프랑스는 77%, 미국은 65%, OECD 평균은 63%였다. 서민과 소외계층이 실감할 수 있는 연구개발 정책이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 증가는 물론 사회적 갈등 해소에도 기여할 것으로 보고서는 예측했다.

삶의 질 관련 과학기술 수준도 뒤쳐진 상황이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선진국에 비해 재난·재해 분야에서는 약 9년, 의료·복지 분야에서는 약 8년의 기술 격차가 난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번 조선대 IT융합학과 교수는 “이번 사업으로 기술 격차가 어느 정도 해소되더라도 기술의 혜택이 국민에게 고루 돌아가려면 공익적 가치를 우선하는 사회시스템이 먼저 갖춰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임소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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