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세하고도 세련됐다. 올해 나온 한국영화 중 몇 손가락 안에 꼽힐 만한 완성도를 지녔다. 세공술만 빼어난 게 아니다. 꽤 많은 웃음을 동반하고 적당히 애절하기까지 하다. 이만하면 티켓 값을 아까워할 관객은 그리 많지 않을 듯 하다.
영화는 연애에 젬병인 사람들의 사랑을 실현시켜 주는 일종의 ‘연애 흥신소’인 시라노 에이전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당신의 사랑을 이뤄드립니다. 쥐도 새도 모르게’라는 광고 문구를 내건 이 집단은 의뢰인의 패션 코디 등 연애와 관련한 사항을 전방위로 ‘조작’한다. 짝사랑의 대상이 된 인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 연애 전략을 세우고, 작전을 수행한다. 첨단 이어폰 등을 활용해 결정적인 순간에 날려야 할 ‘대사’를 전달하기도 하고, 짝사랑의 대상을 사랑에 빠뜨리기 위해 그 주변에 사람을 심기까지 한다.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 안 한다’는 신조를 가진, 일종의 연애간첩단인 셈이다.
도입부부터 웃음이 터져 나온다. 영화 ‘방자전’에서 “?뗍?” 등의 혀 짧은 대사로 관객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송새벽이 폭소 배달원 역을 자임한다. 그는 혀 짧은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투박한 외모의 청년이 첼로케이스를 둘러맨, 말쑥하고도 감상적인 도회지 남성으로 변모해 사랑을 쟁취하는 과정을 깔끔한 웃음으로 전달한다.
영화는 그렇게 송새벽의 연애 조작을 통해 시라노 에이전시라는 낯선 집단의 정체를 전한 뒤 본격적인 사랑 이야기로 진입한다. 훤칠한 외모에 잘나가는 펀드매니저라는 남부럽지 않은 스펙을 지닌 상용(최다니엘)이 사랑을 의뢰하면서 등장인물의 감정이 파도를 타기 시작한다. 상용이 맺어주길 원하는 여인 희중(이민정)은 시라노 에이전시 대표인 병훈(엄태웅)의 옛 연인. 병훈은 의뢰비를 터무니없이 높게 책정하는 등의 고의적 행동으로 상용의 연애사업을 방해하려 하나 일은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 병훈이 사랑이냐 직업윤리냐는 갈림길에서 고민하는 가운데 상용과 희중은 조금씩 사랑을 키워간다.
제목이 시사하듯 1897년 초연된 프랑스의 유명 연극 ‘시라노 드 벨주락’에 뿌리를 두고 있다. 코가 비정상적으로 큰 추남 시라노가 부하 크리스티앵을 위해 자신이 짝사랑하는 여인 록산에게 보내는 연애편지를 대필하면서 벌어지는 연애담을 그린 이 연극은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어져 큰 인기를 모았다. 영화는 이 고전을 21세기 서울로 가져와 매우 창의적으로 변주해낸다.
연애 조작단 단원으로 등장하는 박철민, 박신혜 등 배우들의 연기가 두루 좋다. 박철민이 송새벽의 촌스런 말투를 지적하며 던지는 “어투가 금강하류 쪽이네요. 일단 고치십시다. 한강중류 쪽으로”라는 대사, 술에 취한 상용이 시라노 에이전시에 소심하게 불만을 터트리는 “사업자 등록도 안돼 있고 카드는 왜 안 봤어” 등의 대사는 곱씹을수록 웃음이 배어난다.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를 패러디 한 동해안의 카페 ‘군인과 바다’가 등장하는 장면에선 포복절도할 지경이다.
영화에 나오는 몇몇 사랑의 전술은 실전에서도 써볼 만 하다. 차를 좌회전할 때 옆으로 함께 달리는 버스를 보며 “저도 저런 버스처럼 당신을 보호해주고 싶다”는 닭살 돋는 대사, 여러 사람이 놀러 갔을 때 썩은 복숭아를 덥석 집어 먹으며 타인에 대한 배려심을 드러내는 이른바 ‘썩은 복숭아’ 작전 등은 여심을 낚아채기에 제법 효과가 있어 보인다.
그래도 많은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며 ‘내 머리도 누군가 깎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질 듯하다. 그런 바람들을 격렬히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영화다. 아마도 이 영화, 충무로에 로맨틱 코미디 바람을 일으킬 듯하다. ‘YMCA야구단’ ‘광식이 동생 광태’ ‘스카우트’ 등을 연출한 김현석 감독. 12세 이상 관람가, 16일 개봉.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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