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인 백승종 교수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구한말 평안도 출신의 애국지사 한 분이 서울 북촌 양반가를 찾았다. 영향력이 있는 아무 대감을 만나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할 방책을 말하고, 구국 운동에 적극 앞장서 줄 것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그 애국지사는 나라 형편에 대해 두어 시간 열변을 토하고, 대감이 좀 나서 주셔야겠다는 간곡한 부탁을 끝으로 일어섰다. 잠자코 듣기만 하던 그 대감님, 애국지사가 떠나자 헛기침을 컹컹 내뱉고 담뱃대를 땅땅 치며 "이런 고얀, 이런 일이 있을 수가 …"라고 장탄식을 한다.
국가를 사유물로 여긴 대감님
옆에 있던 문객이 이제 대감이 나서실 모양이로구나 여기고 "대감, 나랏일이 정말 큰일입지요." 하고 한 마디 거들었더니, 대감의 말인즉 이랬다. "아니, 지 놈들이 뭐라고 나라 걱정을 한단 말이야? 이게 지 놈들 나라야! 무지렁이들이 웬 나라 걱정이야, 이게 지 놈들 나라란 말이야! 나라 꼴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대감에게, 조선은 대감님의 나라였고, 평안도 시골 백성의 것이 아니었다. 시골 백성은 통치의 대상일 뿐이다. 나랏일을 걱정해서도 안 된다. 곧 국가를 자신의 사유물로 생각하는 것, 이것이 조선후기 서울에 살았던 대감님들의 생각이었다.
왜 이런 사태가 빚어졌을까. 이익(李瀷)은 의 '생재(生財)'란 글에서 서울의 문벌 가문에 대해 이런 말을 한다.
'서울의 풍습이 문벌을 숭상하여, 한 집안에 높은 벼슬아치가 있으면, 구족(九族)이 가래와 호미를 내던진다. 노비를 대대로 전하는 법이 있기 때문에 문관도 무관도 아니고, 고조 증조가 아무 벼슬도 하지 않았는데도, 노비를 부리며 편안히 앉아 노비들이 생산한 것을 누린다. 만약 직접 농사를 짓는 사람이 있으면 수근 대며 수치스럽게 여기고 서로 혼인도 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놀고먹는 자가 태반이다… 또 경(卿)의 아들만 항상 경이 되기에, 벼슬이 높고 출세하는 사람은 가난하고 미천한 집안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백성의 가난하고 딱한 사정을 도무지 알지 못하고, 부유한 집안 재산을 그대로 이어받아 사치와 교만이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간다.'
서울에 대대로 살면서 국가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가문을 벌열(閥閱)이라 부른다. 그들은 결코 육체노동을 하지 않는다. 육체노동은 수치이기에 농사를 짓는 사람과는 혼인도 하지 않는다. 노비들이 그들의 노동을 대신한다. 한 집안에서 고위관리가 나오면 일가붙이는 일을 하지 않고 그에게 붙어산다. 이들이 대대로 높은 벼슬을 도맡아 하기 때문에 가난하고 미천한 집안에서는 출세하는 사람이 나올 수 없다. 이렇듯 고귀(?)한 삶을 사는 분이라 백성의 가난하고 딱한 사정을 알 리 없다.
이런 양반은 조선 후기에 생긴 것이다. 치열한 당쟁의 결과 18세기가 되면 서울의 불과 수십 가문이 정치 권력을 장악한다. 19세기가 되면 그 폭은 더욱 좁아져 열 개 미만의 가문이 국가 권력을 독점한다. 국가 권력을 사유화한 양반 가문의 출현이 조선후기 정치사의 특징이다.
우리사회'귀족 통치'경계해야
이 글의 서두에 언급한 북촌 대감님 역시 벌열에 의한 국가 권력의 사유화로 나타난 인물이다. 그들끼리의 혼인을 통해 폐쇄적 커뮤니티를 형성한 벌열은 사실상 귀족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최근 외교통상부 장관의 딸이 외교부에 특채된 사건이 문제가 되자, 이내 그와 유사한 사례가 더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 사건은 어떻게든 마무리가 될 것이다. 다만 나는 이 사건에서 국가를 사유화했던 조선시대 서울 귀족들의 모습을 보았다. 우리 사회가 떠받들고 있는 재산과 학벌, 권력, 지역 등의 조건을 중첩하면 어떤 부류가 귀족인지 쉽게 답이 나올 것이다. 그런 귀족에 의한 국가의 통치가 시작된 지 오래라는 사실을 정직하게 인식하지 않는 한, 문제는 양태만 달리하여 계속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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