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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51> 이경석(李景奭)의 애국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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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51> 이경석(李景奭)의 애국정신

입력
2010.09.06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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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점(金自點)은 인조의 반정공신으로 영의정까지 올랐다. 그러나 봉림대군(鳳林大君)은 그가 청나라와 친하다는 것을 알고 싫어했다. 그뒤 봉림대군은 효종으로 즉위해 북벌운동을 벌였다. 이를 본 김자점은 효종이 북벌준비를 한다고 청나라에 고자질했다. 그리하여 1650년(효종 1) 2월 8일에 청나라 사신 6명이 문책사(問責使)로 왔다. 이경석은 영의정으로서 사태를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의주로 직접 가서 사신을 맞았다.

3월 7일 남별궁(지금의 조선호텔)에서 중신들을 앞에 놓고 청나라 사신의 심문이 계속되었다. 청나라 사신은 치제문(致祭文)에 황제 칭호를 쓰지 않은 것이나, 일본을 핑계로 성곽과 병기를 수리한 것이 모두 국왕의 책임이라고 몰아붙였다. 그는 이러한 일은 영의정인 내가 도맡아 한 것이지 국왕은 모르는 일이라고 우겼다. 이경석은 죽을 각오를 하고 가족들로 하여금 상구(喪具)를 준비하라고 했다. 청나라 사신도 이경석이 왕을 위해 희생적으로 방파막이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른 관료들은 입을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이경석은 상국을 속인 죄로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효종은 임금 대신 곤욕을 치루는 이경석을 구명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했다. 청나라 사신에게 뇌물을 주기도 하고, 일개 사신을 몸소 찾아가 8,9번이나 선처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기도 했다. 이경석에게 손수 편지를 써 보내 위로하기도 하고, 평안도에 명해 먹을 것을 넉넉히 대주라고도 했다. 인평대군(麟坪大君)·원두표(元斗杓)·이시백(李時白) 등의 사신을 계속 보내 이경석을 살려 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그 결과 9개월 뒤인 12월에 ‘영불조용’(永不調用), ‘방귀전리’(放歸田里)를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그는 그 때의 심경을

“멀고 먼 압록강아! 높고 높은 백마산아!(迢迢鴨綠江 兀兀白馬山)

그대에게 의탁해 두 줄기 눈물을 상림 간에 뿌리리라.(憑君寄雙淚 灑向上林間)”

라고 읊었다. 이경석을 그토록 비난하던 송시열도 이 일에 대해서만은 그의 충성을 인정했다.

그 후 그는 영의정이 아닌 영중추부사로서 20여 년 동안 국정에 자문했다. 석방조건이 관직에 임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경석은 주화파였지만 국가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는 이와 같이 신명을 바쳐 애국한 것이다. 공직자로서 모본이 될 멸사봉공(滅私奉公) 정신이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해 1668년(현종 9)에는 이경석에게 궤장(几杖)이 내려졌다.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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