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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의 시로 여는 아침] 소멸에 대하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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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의 시로 여는 아침] 소멸에 대하여 1

입력
2010.09.05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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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

거실 화장실 수건은 늘 아내가 갈아두는데

그중에는 근래 직장에서 받은 입셍로랑이나

란세티 같은 외국물 먹은 것들도 있지만,

1983년 상주구계서원 중수 기념수건이나

(그때 아버지는 도포에 유건 쓰고 가셨을 거다)

1987년 강서구 청소년위원회 기념수건도 있다

(당시 장인어른은 강서구청 총무국장이었다)

근래 받은 수건들이야 올이 도톰하고 기품 있는

태깔도 여전하지만, 씨실과 날실만 남은 예전

수건들은 오래 빨아 입은 내의처럼 속이 비친다

하지만 수건! 그거 정말 무시 못할 것이더라

1999년, 당뇨에 고혈압으로 장인어른 일년을

못 끌다 돌아가시고, 2005년 우리 아버지도

골절상으로 삭아 가시다가 입안이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가셨어도, 그분들이 받아온 낡은

수건들은 앞으로도 몇 년이나 세면대 거울 옆에

내걸릴 것이고, 언젠가 우리 세상 떠난 다음날

냄새나는 이부자리와 속옷가지랑 둘둘

말아 쓰레기장 헌옷함에 뭉쳐 넣을 것이니,

수건! 그거 맨 정신으로는 무시 못할 것이더라

어느 날 아침 변기에 앉아 바라보면, 억지로

찢어발기거나 불태우지 않으면 사라지지도 않을

옛날 수건 하나가 이제나 저제나 우리 숨 끊어질

날을 지켜보기 위해 저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 재작년인가 스페인에 몇 달 살려고 가면서 수건이야 가서 사면 된다고 생각하고 수건 없이 여행을 간 일이 있었어요. 도착해서 짐을 풀고 수건을 사려고 나가봤더니 동네에는 수건을 파는 곳이 없더군요. 그 날은 실패. 그래서 머리 감고 얼굴 씻고 어떻게 저떻게 얼굴과 머리를 말렸습니다. 구체적으로 묻진 마세요. 그 다음날에는 시내까지 나갔습니다만, 수건 파는 집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다음 날에도 어떻게 저떻게 얼굴을 닦았는데… 그 다음 날에는 어떻게도 저떻게도 닦을 게 없는 상황. 하루 종일 시내의 뒷골목을 헤매다가 간신히 창업한 지 50년은 된 듯한 수건가게를 발견했습니다. 스페인 도착해서 사흘 동안 한 일이라고는 수건 산 일. 수건! 그거 정말 무시 못할 것이더군요.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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