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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준의 문향] <48> 담정 김려의 '연희네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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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준의 문향] <48> 담정 김려의 '연희네 집'

입력
2010.09.05 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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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정(藫庭) 김려(1766-1821)는 이옥(李鈺)ㆍ김조순(金祖淳) 등과 함께 이른바 패사소품(稗史小品) 문학인의 한 사람이다. 정조(正祖) 문체반정의 한 가운데서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잃고, 서학(西學)의 문제로 32세에 함경도 부령(富嶺)으로 유배되고, 다시 경상도 진해로 옮겨지며 10여 년을 정배 살았다. 은 부령에서 깊이 사랑하게 된 여인 연희를 회상하며 진해에서 지은 《사유악부(思牖樂府)》 시의 한 편이다. ‘사유’란 ‘생각하는 창문’이란 뜻으로, 담정이 남쪽 유배지의 창문에 붙인 편액(扁額)이라고 했다. 진해로 이배(移配)되자 하루도 북쪽으로 연희를 생각지 않는 날이 없었는데, 생각이란 즐거워서도 하고 슬퍼서도 하고, 하면 할수록 못 잊는 연상으로 290편 《사유악부》를 이루었다. 시는 넘치는 생각으로, 매 편마다 민요의 메김 소리처럼 “무얼 생각하나, 저 북쪽 바닷가”를 머리에 얹었다.

“무얼 생각하나, 저 북쪽 바닷가,

눈에 삼삼한 성 동쪽 길

두 번째 다리 곁에 연희가 살지.

집 앞엔 한 줄기 맑은 시내 흐르고

집 뒤엔 험한 암석 산 주위를 덮었네.

계곡 가에 버드나무 수십 그룬데

문 앞에 한 그루 누각에 비치네.

누각 위엔 창에다 베틀을 놓았고

누각 아래엔 한 자 높이 돌절구 있네.

누각 남쪽 작은 우물엔 앵두나무 있고

누각 밖은 북쪽으로 회령 가는 길.[問汝何所思 所思北海湄, 眼中分明城東路 第二橋邊蓮姬住 屋前一道淸溪流 屋後亂石顚山周 谿上楊柳數十株 一株當門映粉樓 樓上對牕安機杼 樓下石臼高尺許 樓南小井種櫻桃 樓外直北會寧去](박혜숙 옮김;《부령을 그리며》,돌베개),

부령은 이름난 유배의 땅이면서, 경성 등과 함께 임금에게 어물을 진상하는 마천령 이북 네 고을의 하나였다. 동쪽 60리에 남반ㆍ북반 두 포구가 있고 “남포의 도미는 날치만큼 컸다”며 그 북쪽 바닷가를 그리워했다. 석보(石堡)의 남쪽, 청계(淸溪)의 서쪽, 200호가 살았다는 이 부령에서도 “성 동쪽 길 두 번째 다리 곁”에 연희네 집이 ‘사유’ 곧 ‘생각하는 창문’의 원천이다. ‘산고수장루(山高水長樓)’, 그 아래로는 단풍나무 숲, 누각 위엔 창에다 베틀을 놓고, 누각 아래엔 한 자 높이 돌절구와 남쪽으로 앵두나무 선 작은 우물. 그의 혼은 꿈속에도 사랑의 지도를 그린다. 연희는 유배객의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서 목욕재계하고 제수 차리고, “살아서나 죽어서나 저버리지 않는 벗은 억만 사람 가운데 하나나 있을까요”속삭이던 여인이다.

그러나 “누각 밖은 북쪽으로 회령 가는 길”이라는 결구에서는 “하늘 끝 땅 끝에 산과 강이 막힌다”는 싯귀 그대로의 절망이다. 그럼에도 사랑이란 생각하면 할수록 더 못 잊게 되는 것, 그렇게 《사유악부》는 유배와 이별의 땅 ‘부령’을 연희의 땅, 사랑의 문학 지리(文學地理)로 자리매김한 유배객의 눈물어린 절창(絶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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