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아버지는 정부 공보처의 영화 검열관이었다. 중앙청 영화 시사실에서 아버지의 무릎 위에 앉아 무수한 무성ㆍ흑백영화의 검열을 지켜봤다. 그런 그가 한국 영화계를 뒤흔든 흥행 감독이 된 것은 역설적이고도 당연한 결과였다. 이장호(65)감독은 1974년'별들의 고향'으로 영화계에 등장해 동시대 청춘의 감수성을 뒤흔들었다.
이 영화는 관객 5만 명을 넘는 영화가 손에 꼽을 정도이던 시절, 46만 관객을 동원했다. 하지만 백발이 성성해진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2시간의 강연을'별들의 고향'의 잘못을 꼬집는데 썼다.
31일 오후 서울 관악구 서울대 미술관 2층 강연장. 서울대 평생교육원 개원 기념 공개특강에서연사로 나선 이 감독은 먼저 "내 생애는 결함, 실패, 무능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이 시련이 없었으면 나는 자연도태 됐을지도 모른다"고 입을 뗐다. 데뷔 2년 만에 대마초 흡연이 발각돼 4년간 활동정지 처분을 받은 시기가 자신의 영화관을 바꿨다는 것.
그는 "쉬면서 동료들의 영화, 옛 영화를 많이 봤다. 5.16 쿠데타가 있었던 61년 이후로 한국영화의 리얼리즘이 어느 틈에 싹 사라져버린 게 보이더라"고 말했다. 새마을운동 등 정책에 부합하는 영화에만 혜택을 줬던 군사정권의 회유정책에 '찬물이 서서히 뜨거워지는 줄도 모르고 죽어가는 개구리처럼'길들어 가더라는 것. 그는 "보통 사람들의 현실에는 없는 호화로운 응접실, 조교, 재벌의 삶을 화면에 담은 별들의 고향도 결국 거짓을 그린 영화였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 감독은 "다시 영화를 만들 수 있게 된 순간부터 소외계층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가난하고 취약한 우리 사회 곳곳을 솔직하게 그리고자 노력했다"고 회고했다. 그렇게 만든 영화가 개발에 밀려난 도시빈민의 삶을 그린 '바보선언'(1984)이다. 이 영화는 한국영화 최초로 19회 시카고 국제영화제 우수영화상을 받았다.
또 그는 "상류 사회를 그렸던 영화들은 아무리 멋을 내도 풍속이 지나고 세월이 조금만 흐르면 촌스럽고 유치해 보이는데, 이상하게 가난한 사람들을 그린 영화는 지금도 리얼하다"며 "아마 달동네의 모습이 20~30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어 그런 모양"이라고 했다. "내 영화들이 (촌스러워 보여서) 고전이 못돼도 좋으니 달동네가 좀 멋지게 변했으면 한다"고 그는 말했다.
이장호 감독은 '별들의 고향'이후 '바람 불어 좋은 날'(1980), '바보 선언'(1984), '이장호의 외인구단'(1986),'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1987)등을 만들었다. 2000년부터 올 6월까지는 전주대 영상콘텐츠 학부 교수로 재직했고, 현재 서울영상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강연에는 서울대 평생교육원의 예비수강생 150여명이 몰려 강연 뒤 질문들을 쏟아냈다. 그 중다음 작품에 대한 질문에 이 감독은 "선교 도중 납치를 당한 극한 상황에서 순교(殉敎)와 배교(背敎)의 기로에 선 인간의 이야기를 다룰 것"이라고 말했다. 노장(老將)의 눈이 빛났다.
김혜영기자 shi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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