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용 의류 제조업체인 P사는 지난 3월 한 TV홈쇼핑 채널을 통해 세 차례 제품을 방송했다가 된서리를 맞았다. 매출액의 38%를 판매수수료로 떼 주는 것은 물론이고, 진입(첫 방송) 비용 1,000만원, 사전 광고제작비 2,100만원, 모델료와 성우 사용비를 포함한 방송 진행비용 330만원 등 각종 비용을 제하고 나니 오히려 800만원이 넘는 적자였다.
최모 사장은 "뭣 때문에 6개월간 홈쇼핑업체 사람들 쫓아다니며 애걸복걸했나 싶어 울화가 치밀었다"고 분개했다.
최 사장이 TV홈쇼핑의 문을 두드린 건 지난해 9월 말. 이탈리아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귀국해 회사를 차린 지 1년이 되어 가지만 별다른 판로가 없어 고민하던 때였다. 우연히 TV홈쇼핑업체에 근무하는 고교 동창과 연락이 닿아 홈쇼핑업체 측과 접촉을 하게 됐다.
그런데 첫 만남에서부터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닥쳤다. 유명 브랜드의 상표를 부착하는 OEM(주문자생산)방식의 판매를 요구 받은 것. 최 사장은 "신생 브랜드여서 판매가 부진할 경우 자신들의 이미지가 훼손된다며 이를 강요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홈쇼핑 출연을 빌미로 하청업체가 되라는 요구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식사비용과 술값으로 300만원이 넘는 돈을 써가며 꼬박 두 달을 매달린 끝에 OEM대신 독자 브랜드로 방송을 내보내자는 답변을 얻어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노골적인 금품 요구까지 있었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나중에 조금 줄긴 했지만, 첫 방송 비용으로 2,000만원, 판매수수료로 매출의 40%를 각각 요구 받았다. 사전 광고제작비, 모델료 등 일부 방송비용, ARS 자동주문전화 비용과 카드 무이자할부 비용, 반품 비용 등도 모두 P사 부담이었다.
최 사장은 "소비자들에게 첫 선을 보이는 건데 비용 부담이 너무 크다고 했지만 '우리는 땅 파서 장사하는 줄 아느냐'는 핀잔이 돌아왔다"며 "그래도 시간당 5,000만원에다 매출의 11%를 수수료로 내는 '정액 방송'형태 보다는 나을 것 같아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유통업계, 특히 TV홈쇼핑 업체들의 횡포가 '도'를 넘어서고 있다. 사실상 100원짜리 제품에서 최고 60원까지 떼 가는 판매 수수료율, 매출과 상관없이 고액 수수료를 강요하는 정액방송, 과도한 납품단가 인하 등으로 중소 납품업체들을 벼랑으로 내몰고 있다.
이는 정부의 '승인' 없이는 시장 진입이 불가능해 GS샵과 CJ오쇼핑, 현대홈쇼핑, 롯데홈쇼핑, 농수산홈쇼핑 등 5개 업체가 견고한 독과점 체제를 형성하고 있는 게 일차적 원인이다.
여기에다, 홈쇼핑 업계가 한정된 방송시간을 앞세워 규모도 작고, 자체 유통망도 없어 목매달 수 밖에 없는 납품업체들을 가혹하게 쥐어 짜면서'제 밥그릇 챙기기'경쟁에 열을 올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높다.
지난해 공정거래위원회의 유통업체 실태조사 결과 중소 납품업체들의 체감 수수료율은 평균 58%였다. 정상적 기업활동으로는 도저히 수지를 맞추기 어려운 상황인 셈이다.
매출과 관계없이 고액의 수수료를 책정하는 정액방송 강요도 중소 납품업체들을 괴롭히는 수단이다. 보통 50분 기준으로 2,000만~5,800만원인데 홈쇼핑업체는 안정적인 수익을 확보할 수 있지만, 납품업자의 실제 수수료율 부담은 60~80%에 달한다. 홈쇼핑업체가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판매실적이 저조할 경우의 손해를 납품업체에게 고스란히 떠넘기는 것이다.
특히 유통학회의 심층면접 과정에선 20만원대 제품을 10만원 이하로 납품하도록 강요받은 한 업체가 1차례 방송에서 -75%의 이익률을 기록한 뒤 결국 재고 부담을 견디지 못해 파산한 경우도 확인됐다.
홈쇼핑 5개사에 납품을 대행하는 한 벤더업체 사장은 "홈쇼핑업체에선 납품업체에게 재고를 충분히 확보할 것을 요구하는데 이 때문에 방송이 중단되면 해당 업체는 큰 타격을 입게 된다"며 "결국 홈쇼핑측이 일정 수수료를 무조건 떼는 정액방송이나 수수료율 인상, 시간대 변경, 사은품 제공 등을 강요해도 따를 수밖에 없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5개 TV홈쇼핑사의 지난해 매출규모는 취급액 기준으로 7조원을 넘어섰다. 전년 대비 21.7% 성장이다. 게다가 같은 기간 당기순이익은 무려 71.3%(2,087억원→3,576억원)나 증가했다.
홈쇼핑업체 2곳에 욕실용품을 공급하는 H사 관계자는 "오죽하면 홈쇼핑 판매 의존도가 높으면 3년을 넘기기 어렵다는 말이 나오겠냐"며 "지금의 홈쇼핑업체는 유통업체가 아니라 방송을 빌미로 악덕 장사를 하는 찰거머리 같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양정대기자 torch@hk.co.kr
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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