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ㆍ25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1959년 대구. 길거리에는 굶주리고, 헐벗은 전쟁 고아들로 넘쳤다. 천주교 대구대교구의 초청으로 선교활동을 하러 한국에 온 수산나 메리 영거(74ㆍ당시 23세)씨는 구두닦이 소년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이들은 구두약에 온 얼굴이 시꺼매지도록 종일 고생해 번 돈을 불량배에게 고스란히 갖다 바치고 있었다. 수산나씨는 아이들에게 “도망치자”며 설득해 먼저 한국에 와있던 친구 집에서 쌀밥을 해 먹이고, 딱딱한 방바닥에서 잠자면서 그들을 보살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교를 갓 졸업한 그는 그렇게 한국이라는 먼 이국 땅에 터를 잡았고, ‘벽안의 천사’로 불리기 시작했다.
청소년보호기관인 대구 가톨릭푸름터(옛 가톨릭여자기술원) 고문인 수산나씨는 지역사회에서 저명한 사회사업가가 됐다. 그는 입국 초기를 회상하며 “런던의 한 국제 캠프에서 6ㆍ25전쟁으로 인한 어려움 등 당시 한국의 경제ㆍ문화적 상황을 접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효성여자대학(현 대구가톨릭대) 등에서 영어교수로 재직하면서도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보살폈다. 1962년 가톨릭여자기술원을 세워 도시로 나온 여성들을 모아 미용 등 기술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
수산나씨에게 한국은 제2의 고향이다.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를 토박이 못지않게 술술 구사할 정도다. 1966년 가톨릭 여성 리더 양성기관인 프랑스 루르드의 ‘옥실리움’강사로 나가 37년간 떠나 있는 동안에도 수시로 한국을 찾으며 가톨릭푸름터 운영을 이어갔고, 한국 문화를 알리는 책 를 영국에서 발간하기도 했다.
2004년 그는 아예 눌러 살 생각으로 다시 입국했고, 지난 3월 영주권도 받았다.
결혼도 마다한 채 한국 땅에서 소외이웃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산 수산나씨는 30일 파라다이스복지재단이 수여하는 파라다이스상 사회복지 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 재단은 “외국인임에도 한국 사회복지 증진을 위해 애쓴 숭고한 희생정신이야말로 이 시대의 귀감”이라고 평가했다.
재단은 10월 19일 오후 3시 대한상공회의소 국제회의실에서 시상식을 열고, 수산나씨와 함께 문화예술 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사진작가 주명덕(70)씨에게 각각 상금 5,000만원과 상장, 트로피를 전달할 예정이다.
박민식기자 bemyself@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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