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명연설 ‘나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47주년을 맞은 28일, 바로 그 장소 워싱턴시 링컨기념관에서 미 보수세력이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중산층 백인 위주의 풀뿌리 정치모임 ‘티파티 운동’이 구심점이 된 이날 모임은 ‘미국의 명예회복’을 주장하며 보수층의 결집을 도모했다. 주최 측은 정치적 의도가 없다고 강조했으나,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시점에 국민들이 오바마 정부에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시위 성격이 강하다.
케이블 뉴스채널 폭스뉴스의 진행자이자 유명 보수논객인 글렌 벡이 주도했으며, 티파티를 적극 지지하는 2008년 공화당 부통령 후보였던 세라 페일린 전 알래스카 주지사가 찬조연설자로 나섰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미국 첫 흑인 대통령 오바마의 대표적 저격수인 이들이 역사적인 자신의 기념일을 망쳐놓는 건 마틴 루터 킹의 악몽일 것이라고 전했다.
미 시사주간 타임은 무엇이 명예회복인지 정확히 설명하지도 않은 두루뭉술한 모임이라고 지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선정적인 말꾼으로 공화당 의원에게 조차 “벡이 나오면 TV를 끄세요”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던 벡도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무언가가 지금 일어나고 있다”며 “미국은 오늘부터 비로소 신(神)에게 돌아가고 있다”고 말하는 등 정치색을 숨겼다. 자신을 이라크전에 참가한 아들을 키운 엄마라고 강조한 페일린도 이날 모인 청중을 애국자로 치켜세우며 “우리는 미국을 재건하고, 미국의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주위를 둘러봐라.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며 애국심 고취에 열심이었다.
뚜렷한 메시지는 없지만 이날 모임은 진보 측을 긴장시키고 있다. 전국에서 50만명이 몰려든 이날 행사가 흩어진 보수층 결집에 성공했다는 분석이다. 이날 집회에 참가한 28세의 한 여성지지자는 “우리는 단지 개인이 아니라는걸 안다”며 “뭔가 이룰 수 있을 것 같다”고 AP 통신에 말했다. ‘다쓴 티백처럼 오바마를 던져버려라’라고 프린트된 티셔츠를 입은 56세의 사업가는 “정부에 반대해 모임에 나왔다. 세금을 더 올릴까 걱정된다”며 정부에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한편 알 샤프턴 목사 등 민권운동가들은 보수진영의 집회가 킹 목사 기념일에 맞춰진 것에 강한 불만을 표시하며 보수세력의 행사장 주변에서 맞불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링컨 기념관에서 약 5㎞ 떨어진 한 고등학교에서 항의집회를 열고 행진을 벌여 양측 참석자들이 뒤섞였으나 충돌은 없었다.
킹목사의 둘째아들 마틴 루터 킹 3세는 “아버지는 인종ㆍ종교 국적ㆍ정치성향의 차이에서 오는 모든 형태의 차별을 반대했다”며 어떤 의견이든 개진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보수 측의 이날 집회가 모욕적이며 “민권운동을 위해 싸운 사람들의 뺨을 때리는 행위”라고 매도했지만 유명 야구선수 알버트 푸홀스나 킹목사의 손녀딸 등을 비롯 흑인과 히스패닉도 보수집회에 참석했다.
채지은기자 c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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