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한일 강제병합 100년/ 정재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미즈노 나오키 교토대 교수 대담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한일 강제병합 100년/ 정재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미즈노 나오키 교토대 교수 대담

입력
2010.08.27 12:04
0 0

■ "식민지배는 분단 부른 현재적 사건…韓日, 역지사지 태도 필요해"

1910년 8월 29일 한일강제병합조약 공포 이후 36년간 지속된 일제의 한국 강점은 한국 민족사에서 가장 불행한 사건이었다. 주체적인 근대 국민국가를 수립할 기회를 잃어버렸고, 유례없는 강압통치는 헤아릴 수 없는 물적ㆍ정신적 상처와 후유증을 남겼다.

한일강제병합조약이 공포된 지 꼭 100년이 되는 29일을 앞두고 한일 양국의 중진 역사학자인 정재정(59)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과 미즈노 나오키(水野直樹ㆍ60) 교토대 인문과학연구소 교수의 대담을 마련했다. 지난 25일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만난 두 사람은 일본의 식민지배가 초래한 양국의 역사갈등의 원인과 해법을 모색하고, 양국이 진정한 역사의 동반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_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통치의 성격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는가.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통치와 비교한다면.

▦정재정=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도 식민지 경영을 했지만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나라를 식민지로 삼은 예는 없다. 일본이 조선 지배의 명분으로 ‘동문동종’(同文同種ㆍ같은 한자를 쓰고 같은 황색인종임)을 내세운 것처럼 양국은 역사적ㆍ문화적으로 가까운데, 이런 나라를 식민지화한 경우는 없다. 일본은 또 소위 내선일체를 내세워 성명을 일본식으로 바꾼다든지 일본어 사용을 강제한다든지 하는 강경한 동화정책을 썼는데 이는 한 민족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통치방식이었다. 일본은 조선을 대륙 진출의 교두보로 삼았다. 식민지사회에 사회, 경제 인프라를 구축했는데 이것도 좀처럼 볼 수 없는 방식이다. 물론 경제개발을 했다고 하지만 그 과실은 주로 일본인들에게 집중됐다.

▦미즈노 나오키= 일본의 식민지정책은 동화정책을 강화하면서도 차이를 해소하지 않거나 차이를 남긴 채 동화하는 방식이었다.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은 피지배자의 일부, 엘리트만 동화하려는 정책을 썼다. 가령 프랑스는 식민지 알제리의 엘리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프랑스어를 교육해 프랑스 시민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그들을 전적으로 프랑스 시민으로 대우했다. 반면 일본은 모든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동화하려 했지만 실제로 일본인과 동등한 지위와 권리를 부여하지 않았다. 일본어 상용, 황국신민화정책 같은 것은 조선인을 전쟁에 동원하려는 정책이었다.

_ 논란이 있지만 식민지근대화론에 비판적인 학자들도 식민지시기 조선이 근대적 면모를 갖추게 된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식민지 근대화의 성격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정= 식민지근대화론은 평균수명의 증가, 취학률ㆍ무역액의 확대, 도로ㆍ철도의 확충 등을 중시하는 것으로 주로 경제적 측면에 주목한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라는 특수상황에서 이뤄졌다는 점을 고려해야 된다. 파이는 커졌지만 과연 그 근대화의 과실을 누가 향유했는가를 물어야 한다. 식민지 말기 조선인이 2,500만명, 재조(在朝) 일본인은 70만명이었다. 그런데 조선 자본의 90%가 일본인의 수중에 있었고 대기업과 대토지의 경영자도 일본인이 대다수였다. 이것을 정상적 국민국가의 경제성장과 같다고 볼 수 있을까.

▦미즈노= 결과적으로는 도시화가 진행됐고 도시로 인구가 몰려들었고, 생활상에 있어서 근대화가 된 부분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조선사회 전체를 봤을 때 근대적인 생활의 혜택은 극소수에게 집중됐다. 식민지 근대의 성격을 해명할 때 경제적 측면을 중시하는 ‘근대화’와 문화ㆍ사회상을 주목하는 ‘근대성’은 구분될 필요가 있다. 또한 식민지 조선에 이식된 근대는 서양적 근대와는 다른 ‘일본적 근대’라는 성격도 있었다. 이런저런 문제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정= 근대화를 ‘좋은 것’ 또는 ‘이룩해야 할 것’이라는 긍정의 시각으로만 보아서는 안된다. 근대화의 과정에서는 정교한 폭력과 강력한 동원이 난무했다. 긍정과 부정의 측면을 감안하여 문제를 이해해야 한다.

_ 지난 10일 발표된 간 나오토 일본 총리의 담화에 대해 평가한다면.

▦미즈노= 일본 내에서는 담화의 진정성이 불충분했다는 의견과 왜 한국에 몇 번이고 사과해야 하느냐는 의견이 엇갈렸지만 일본 언론매체들은 대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 같다. 병합조약이 ‘무효’ 라고 말하지는 않았으나 한국인들의 ‘뜻에 반한 식민지 지배’라는 표현은, 내 생각에 그것을 우회적으로 인정한 것이라 생각한다. ‘반성과 사과의 뜻을 표명한다’고 했던 1995년 무라야마 담화보다 진전됐다고 본다.

▦정= 한국병합이 강제적이고 불법적이고 부당하게 이뤄졌다고 생각하는 한국인들의 처지에서 보면 대단히 불충분하다. 그러나 기준을 낮춰 보면 3가지 점에서 평가할 수 있다. 일본 총리가 강제병합 100년에 맞춰 담화를 발표했다는 점, 한국인의 의사에 반해 식민지배를 했다는 것을 인정한 점, 말로만 그친 것이 아니라 조선왕실의궤 반환, 사할린 한국인 문제의 해결 등 행동플랜을 제시한 점이다. 불충분한 점은 양국이 협의를 통해 진전시켜야 한다.

_ 일본 총리가 여러번 사과를 해도 한국인들은 ‘진정성이 없다’고 비판하고 일본인들은 ‘언제까지 사과만 해야 하느냐’라고 불평한다. 어떻게 접점을 찾을 수 있을까.

▦정= 한국인들은 피지배자로서, 일본인들은 지배자로서 한국강제병합 이후의 근현대사를 이해하기 때문에 시각 차가 클 수밖에 없다. 역사인식의 접점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사실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상대방의 처지에서 사태를 바라보려는 역지사지의 자세가 필요하다.

▦미즈노= 일본인과 한국인의 역사인식이 다른 것은 이상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왜 상대방이 그런 생각을 하는가?’를 이해하려는 자세다. 지금까지 일본도 한국도 이 문제를 생각해보지 않았다.

_ 근현대사 교육을 의도적으로 외면한 일본이나 식민사관 극복을 역사교육의 지상과제로 삼았던 한국 모두 문제가 아니었을까.

▦미즈노= 일반인들의 역사인식은 교육보다는 오히려 역사드라마나 영화 같은 매체에 영향을 받는다. 요즘 일본에서는 메이지시대를 긍정적으로 해석한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의 역사소설 을 원작으로 한 TV드라마가 인기다. 이 드라마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해 일본이 강대국이 됐다는 역사관을 깔고 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졌고 조선인들이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은 나오지 않는다. 한국인들도 TV 드라마를 통해 역사를 공부하고 이해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정= 식민지에서 해방된 한국이 민족주의적 역사교육을 실시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국의 TV도 1년에 두 번, 3ㆍ1절과 광복절을 전후해 역사 관련 특집방송, 드라마를 자주 편성한다. 어떤 시각에서 구성하느냐가 중요한데 얼마전까지 무조건 일본인은 ‘탄압자’, 한국인들은 ‘저항자’로 묘사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최근에는 식민지시기 다양한 유형의 인간생활을 보여주려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역사를 보는 시각이 넓어지고 깊어지리라고 생각한다.

_ 한국에서는 일본 민주당의 아시아 중시 외교를 주시하고 있다.

▦미즈노= 냉전체제가 해체되면서 일본은 동아시아라는 세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됐다. 아시아를 중시하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앞으로 잘될지는 모르겠다. 민주당 정권의 한계가 아니라 일본사회의 한계 때문이다. 냉전기 일본은 미국과 동맹관계를 맺었는데 많은 일본인들은 아직도 그 선택을 중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쟁 전의 ‘대동아공영권’과 같은 생각은 아니지만 아시아 각국들과 대등하게 서로 돕는 관계를 맺기보다는 일본이 중심국가가 돼 이끌어가야한다는 생각이 일본사회에서는 지배적이다.

▦정= 한중일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각국의 상호의존관계가 심화하고 있다. 한국의 대일본, 대중국 교역액은 한국과 미국, 한국과 유럽연합의 교역액을 뛰어넘고 한국과 일본은 1년에 500만명, 한국과 중국은 700만명이 왔다갔다한다. 양국에 어떤 정권이 들어서든 현실적으로 아시아 중시 외교정책을 펼 수밖에 없다. 미즈노 교수가 일본의 한계를 말했는데 사실 우리도 한계가 있다. 지금처럼 남북관계가 악화되고 한중관계가 긴장되면 미국과 일본에 더욱 밀착할 수밖에 없다. 동아시아지역의 냉전을 완화하고 평화롭게 공존공영하는 방법을 고민해야한다.

_ 유럽공동체에서 보듯 지역공동체의 형성은 세계사적 과제다. 한일관계의 발전을 밑거름으로 동아시아공동체를 이뤄낼 수 있을까.

▦미즈노= 민주당이 출범하며 하토야마 전 총리가 동아시아 공동체에 대해 이야기하긴 했는데 구체적으로 진전된 것은 없는 것 같다. 양국 정부 차원에서는 자유무역협정과 관련된 얘기가 오가고 있는 것 같은데 협정만 맺는다고 동아시아 공동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시민 차원의 교류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관광객 수백만명이 오가는 것보다 양국의 시민들이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정= 대동아공영권을 시도했다가 좌절한 경험이 있는 일본이나, 중화제국이라는 역사적 경험을 갖고 있는 중국은 동아시아 공동체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의미가 있지만 유럽공동체를 상상하면 적어도 20~30년이 지나야 가능한 얘기라고 본다. 주권의 상당부분을 공동체에 이양하고 안보도 같이해야 하는데 지금과 같은 상호 불신과 대립과 갈등으로는 쉽지 않다. 현실을 인정하고 공동의 이익이 되는 분야부터 함께하다보면 상대방에 대한 이해도 깊어지고 불신감도 사라질 것이다.

_ 한일강제병합 100년은 역사학자의 입장에서도 의미가 새로울 것이다. 향후 양국 역사학자들 앞에 놓인 과제는 무엇인가.

▦정= 10년 전에 비하면 한일관계 연구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지금까지는 한국사면 한국사, 일본사면 瞿뻣渶?자기 나라 자료로만 연구했는데 지금은 자료 공유의 시대다. 동아시아라는, 더 나아가 세계사라는 폭넓은 시야에서 역사를 바라봐야 한다. 나는 지난 20여년간 한일간 역사대화, 한일 공동 역사교재 편찬에 주력해왔다. 앞으로도 그런 노력을 계속한다면 두 나라의 상호이해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미즈노= 10년, 20년 전만해도 한일 역사학자들이 서로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기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일본의 역사연구자로서 식민지배의 역사를 아직도 해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창씨개명, 황국신민의 서사, 치안유지법 등 식민지하 일상에서의 지배정책을 해명하는 연구를 하고 싶다. 일본인들은 한반도의 침략과 지배가 결과적으로 남북분단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병합은 단순히 100년 전의 역사적 사실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한국인들에게 이 사건은 남북분단으로 이어지고 있는 현재적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역사적 의미를 일본사회에 전하는 역할을 하고 싶다.

진행ㆍ정리= 이왕구기자 fab4@hk.co.kr

류효진기자 jsknight@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