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낸 첫 책 ‘녹색시민 구보씨의 하루’는 그 해 환경부 우수환경도서, 다음 100년을 살리는 100권의 환경책, 간행물윤리위원회 청소년 권장도서, 서울시교육청 중고등학생 추천도서로 선정됐다. 두 달 뒤 나온 ‘지구를 살리는 7가지 불가사의한 물건들’도 우수환경도서, 100권의 환경책, 중고등학생 추천도서로 선정됐다.
이어지는 호평에 장은성(40) 그물코 대표는 생태 도서를 내겠다는 자신의 선택을 더욱 확신했다. 어차피 큰 돈 벌려고 시작한 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대로 원하는 책 마음껏 만들겠다는 소박한 목표를 이룰 것 같았다.
하지만 3년 뒤 그는 서울 생활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연고 없는 시골로 내려갔으니 귀향도, 금의환향도 아니었다.
경제적 문제로 농촌 갔다가 빚도 다 갚아
“좀 놀랐어요. 독자 반응도, 출판계 평가도 좋았으니까. 그런데도 책을 낼수록 빚이 쌓였습니다.”
욕심이 컸거나 투자가 과했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책을 낼수록 빚이 불어 버틸 수 없었다. 많이 찍고 많이 유통시키고 반품도 많이 받는, 그가 출판을 시작할 때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물량 위주 제작 유통 시스템을 그 자신이 어느 새 따른 결과였다. 옥탑방에서 1인 출판사로 시작했지만 조금 더 해보자며 사무실 얻고 편집자, 영업자를 쓴 것도 부담을 키웠다. 그때 건물주가 건물 리모델링을 이유로 비워달라고 했으니 꼼짝 없이 나와야 할 판이었다. 사정을 잘 아는 후배가 충남 홍성으로 내려오면 빈 사무실을 공짜로 이용할 수 있다고 했다. 서울로 가지 못해 안달인 세상에, 서울 출신인 그가 시골로 내려간 것은 출판계 안팎에서 조그만 이야깃거리가 됐다. 만 서른 다섯이던 2005년 7월 그의 농촌 생활은 시작됐다.
“사실 홍성이 어떤 곳인지 모르고 내려왔어요. 한적한 시골이고 돈도 적게 들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만 있었으니까요.”
자리를 잡은 홍성군 홍동면 일대는 외견상 논과 야산이 함께 있는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하지만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등을 중심으로 주민들이 활기차고 분주하게 살고 있었다. 돈 때문에 얼떨결에 내려왔지만 지역의 역동성에 놀라고 말았다.
명색이 생태전문 출판사 대표였지만 농업과 농촌에 대해 아는 것은 너무 적었다. 논과 들에서 자라는 쌀, 보리, 밀도 제대로 구별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농촌의 낯선 사람과 안면을 트고 섞이면서 차츰 그곳 생활에 적응했다. 책은 내지 않았으며 서울에서 낸 책의 반품을 받고 재고를 정리하며 거품을 꺼뜨렸다.
2006년 1월말 을 번역 출판하면서 다시 책을 냈다. 등은 서울에서 내고 싶었지만 빚에 몰려 못 내다가 홍성에서 출판한 것들이다. 이번에는 밀어내기 식의 제작과 유통은 피했다.
농촌에서 하는 출판이라고 크게 어렵지는 않다. 도리어 시골로 이사한 출판사에서 책을 내겠다며 필자와 역자가 찾아왔다. 박희병 서울대 교수가 쓴 과 한무영 서울대 교수가 번역한 가 그런 책들이다. 그물코는 현재 행정구역상 리에 주소지를 둔 유일한 출판사로 알려져 있다. 지역단체의 소식지 등 홍성에서 얻은 일거리도 제법 있었다. 이제 장은성 대표는 빚도 다 갚고 서울의 가족에게 작으나마 생활비도 보낼 수 있게 됐다. 직원도 한 명 두었다.
출판과 농사 병행하지만 농사에 마음 더 가
그는 절반은 출판인이고 절반은 농민이다. 오전에는 원고 검토 등 출판 일을 하고 오후에는 농사를 짓는다. 텃밭 50여 평에서는 고추, 가지, 오이 등이 자란다. 면적이 넓지 않지만 수확량은 생각보다 많아서 한여름 내내 먹고 남을 정도다. 작년부터는 홍순명 풀무학교 전 교장의 권유에 따라 200평 규모의 논농사를 짓고 있다. 작년에는 벼 세 가마를 수확했다. 닭, 돼지도 기르는데 서울서 태어나 서울서 자란 그가 가축까지 키울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농촌 생활이 무료하거나 따분할 틈이 없다.
장은성 대표는 “요즘은 출판보다 들 일에 마음이 간다”며 “도시 사람들이 농사라면 지레 겁을 먹는데, 물 관리 잘하고 경험자의 도움을 받으면 그리 어렵지 않다”고 말한다. 농사로 돈벌이 하기는 어렵겠지만, 자기 먹을 것 얻는 차원이라면 할만하다는 것이다. 물론 시행착오도 많았다. 내려온 첫해에 고추 농사 해보겠다고 덤볐다가 탄저병 때문에 심어놓은 고추를 모두 잃었고 배추도 제때 물을 주지 않아 다 죽는 등 아픈 일이 많았다.
오후 농사를 짓고 밤중에 다시 사무실로 나가 출판 일을 하기 때문에 취침 시간은 늦은 편이다. 일찍 자고 일찍 깨는 농촌 생활을 아직 몸에 익히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농촌에 있으면 가끔 서울과 비교를 하게 된다. “서울에서는 사는 게 좀 막막?구석이 있지 않습니까. 죽어라 공부하고 죽어라 일하지만 퇴사 압박을 받는 등 언제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니까요.”
어찌 보면 자신의 체험 때문에 할 수 있는 이야기다. 마찬가지로 농촌에서 자신의 가치를 재발견했다는 것도 체험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서울에서는 책 내는 것 말고는 한 일도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출판 말고도 헌책방 운영, 도서관 건립 참여, 농사 등 여러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저를 사람들이 알아주니 행복합니다.”
느티나무라는 이름이 붙은 헌책방은 주민들이 십시일반 보태준 돈에, 그가 내려올 때 갖고 온 책 2,000여권으로 시작했다. 헌책방에는 아리따운 마을 처녀가 서울로 시집가면서 기증한 피아노가 있는데 아이들이 한밤중에도 찾아와 피아노를 친다.
사람 사는 곳이니 갈등도 있겠지만 그래도 농촌 생활이 만족스럽다. 다만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것은 마음에 걸린다. 장은성 대표는 “함께 있으면 좋겠지만 아내와 딸 아이에게 시골로 내려오라고 당장은 강요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가족은 주말이나 방학 때 만나지만 헤어져 지내는 아쉬움을 그것으로 완전히 달래기는 어렵다.
하지만 특별한 일 없는 한 농촌에서 계속 살겠다고 그는 말한다. 큰 욕심 없이 농촌의 경제 규모에 맞춰 살 수만 있으면 된다. 농업과 이웃이 주는 소중한 행복을 그는 포기할 생각이 없다.
박광희 편집위원 khpark@hk.co.kr
■ 홍동면은 어떤곳
농업 및 생태분야 전문가들은 홍동면을 한국 유기농업의 메카로 부른다. 농약으로 죽어가던 농토를 살리고자 1993년 전국 최초로 오리농법을 시작했으니 그렇게 부를 만 하다. 인구 4,700명의 작은 마을이지만 주민들이 여러 조직을 통해 다양한 시도를 하면서 새로운 농촌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것들을 보려고 1년에 2만 명이 마을을 찾아온다.
그 바탕에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가 있다. 1958년 문을 연 이 학교는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두고 학문과 농업을 함께 익히는 전인교육을 지향한다. 1975년부터는 원예, 벼농사, 축산 등에서 유기농업 교육을 하고 있다. 2001년에는 일종의 주민대학인 2년제 전공부를 개설했다. 마을에 정착, 유기농업과 공동체 정신을 잇는 졸업생이 적지 않다.
풀무학교생활협동조합은 풀무학교 전공부에서 재배한 밀과 지역 농산물로 통밀빵 등을 만들며 풀무비누공장은 폐식용유를 재활용해 비누를 생산한다. 반짇고리공방은 조각보, 매듭 등 공예품을 만들거나 그 방법을 가르치며 풀무영농조합법인은 미생물 거름을 생산한다.
홍성친환경작목회, 홍성환경농업마을영농조합법인 등은 환경농업기술을 개발, 실천, 보급하며 홍성여성농업인센터는 육아 등 여성 농업인의 고민 해소를 목표로 하고 있다.
양봉을 하는 장애인공동체인 하늘공동체도 홍동면에 있으며 농민, 교사, 건축가 등 다양한 직업인들이 생태적 삶을 살겠다고 건설한 한울마을은 이웃 장곡면에 있다.
2007년에는 시민단체 에너지전환(옛 에너지대안센터)이 서울에서 홍동면으로 거점을 옮겼다. 전국 규모의 시민단체로는 처음이었다. 이 단체는 난방에너지 소비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패시브하우스를 건설해 실험 중이다. 마을에는 태양광 발전기를 설치한 집이 많아 대안 에너지에 대한 주민들의 관심을 보여준다.
마실이학교(070-4195-6604)로 연락하면 홍동면 견학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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