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김연수의 시로 여는 아침] 이것만 쓰네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김연수의 시로 여는 아침] 이것만 쓰네

입력
2010.08.24 07:20
0 0

이기철

내 언어로는 다 쓸 수 없어 이것만 쓰네

山房에 벗어놓은 흰 고무신 안에 혼자 놀다 간 낮달을

내게로 날아오다 제 앉을 자리가 아닌 줄 미리 알고 되돌아간 노랑나비를

단풍잎 다 진 뒤에 혼자 남아 글썽이는 가을 하늘을

한 해 여름을 제 앞치마에 싸서 일찌감치 풀숲 속으로 이사를 간 엉겅퀴 꽃씨를

내 언어로는 다 쓸 수 없어 이것만 쓰네

사월 달래순이 묵은 돌덩이를 들어 올리는 힘을 본 것도 같은데

저를 좀 옮겨달라고 내 바지 자락에 매달리는, 어언 한 해를 다 살아버린 풀씨의 말을 알아들은 것도 같은데

아직도 흙 이불로 돌아가지 못한 고욤 열매의 추위를 느낀 것도 같은데

다 쓸 수 없어 이것만 쓰네

● 초등학교 선생님이 미술 시간에 아이들에게 그림을 그리라고 했답니다. 한 아이가 20분째 스케치북을 감싸고 웅크린 채 그림 그리기에 몰두했습니다. 하도 기특해서 선생님이 가서 물었습니다. “지금 뭘 그리니?” 아이는 그림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말했습니다. “신을 그리고 있어요.” 선생님이 놀라서 말했습니다. “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야 그리지.” 그러자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이젠 아시게 될 거예요.” 가끔 아이들의 자신감이 부러울 때도 있어요. 하지만 어른들도 몰라서 거기서 입을 다무는 건 아니죠. 그럼 이유가 뭐냐고 꼭 집어서 말해달라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럴수록 저도 한사코 여기까지만 쓰겠어요(글을 못 써서 이러는 게 절대로 아니랍니다).

소설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