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철
내 언어로는 다 쓸 수 없어 이것만 쓰네
山房에 벗어놓은 흰 고무신 안에 혼자 놀다 간 낮달을
내게로 날아오다 제 앉을 자리가 아닌 줄 미리 알고 되돌아간 노랑나비를
단풍잎 다 진 뒤에 혼자 남아 글썽이는 가을 하늘을
한 해 여름을 제 앞치마에 싸서 일찌감치 풀숲 속으로 이사를 간 엉겅퀴 꽃씨를
내 언어로는 다 쓸 수 없어 이것만 쓰네
사월 달래순이 묵은 돌덩이를 들어 올리는 힘을 본 것도 같은데
저를 좀 옮겨달라고 내 바지 자락에 매달리는, 어언 한 해를 다 살아버린 풀씨의 말을 알아들은 것도 같은데
아직도 흙 이불로 돌아가지 못한 고욤 열매의 추위를 느낀 것도 같은데
다 쓸 수 없어 이것만 쓰네
● 초등학교 선생님이 미술 시간에 아이들에게 그림을 그리라고 했답니다. 한 아이가 20분째 스케치북을 감싸고 웅크린 채 그림 그리기에 몰두했습니다. 하도 기특해서 선생님이 가서 물었습니다. “지금 뭘 그리니?” 아이는 그림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말했습니다. “신을 그리고 있어요.” 선생님이 놀라서 말했습니다. “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야 그리지.” 그러자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이젠 아시게 될 거예요.” 가끔 아이들의 자신감이 부러울 때도 있어요. 하지만 어른들도 몰라서 거기서 입을 다무는 건 아니죠. 그럼 이유가 뭐냐고 꼭 집어서 말해달라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럴수록 저도 한사코 여기까지만 쓰겠어요(글을 못 써서 이러는 게 절대로 아니랍니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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